대한민국 마케팅 성공신화
보석상자 속의 과학 - 현대카드 M
국내 신용카드 시장은 2002년 이전까지 매년 100% 이상 고속으로 성장했으나, 내수부진으로 인한 경제성장의 둔화를 계기로 국내시장에 거품이 빠지면서 카드대란이 일어나, 고객들에게 각종 카드 발급이 제한되었고 심사도 대폭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소비가 위축되면서 카드회사들의 실적도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현대카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급한 시기에 현대카드의 경영진들은 흔들리지 않고 반전을 모색했다. 드디어 2003년 봄, 현대카드는 대반전을 위해 비공식 TFT(Task Force Team)를 구성하고 엄선한 사원들을 집결시켰는데, 팀의 명칭은 엑스칼리버(아더 왕과 기사들처럼 힘을 합해 카드업계의 난세를 평정하고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자는 뜻)였다.
그때부터 원탁의 주인공들은 최고의 카드를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되었고, 고도의 과학적 분석 끝에 주력 상품인 현대카드 ‘M’의 전면개편이라는 역발상 전략을 선택했는데, 우선 시급한 것은 카드의 성패를 좌우하는 획기적인 서비스의 개발이었다. 그래서 경제활동인구의 소비 패턴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타깃을 세분화하는 작업을 실시한 끝에, 고객의 모든 소비활동에 혜택을 부여할 때 고객 로열티를 확보하고, 또 해당 카드를 고객의 주 사용 카드로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최대 적립처, 최고 적립률’로 대표되는 포인트 마케팅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문제는 ‘네이밍’이었는데, 소비자 분석결과 다양하고 복잡한 메시지보다 알파벳이나 숫자와 같은 간단명료한 기호를 더 잘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점에 착안해,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알파벳에 대입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렇게 하여 금융권 최초의 알파벳 마케팅이 탄생했고, 이후 신용카드업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된 현대카드 ‘M’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03년 5월, 엑스칼리버는 구 현대카드와 구 노블레스카드를 하나로 통합해 리뉴얼된 현대카드 ‘M’의 첫 번째 모델을 내놓았는데, 새 카드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서비스를 들고 나왔다. 예로 자동차를 살 때 카드 포인트를 선지급함으로써 엄청난 비용을 절감하도록 했고, 고객들에게 국내 최고의 포인트를 지급하고, 현대 계열 포인트를 한데 묶어 쓸 수 있게 하는 등 그야말로 파격 일색이었다. 그 결과 카드 출시 한 달 만인 6월에 카드 발급 신규회원의 수가 6배로 늘어났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지속적으로 카드 사용자들의 높은 충성도를 확보하려면 남다른 관리가 필요했다. 곧 카드이용자 3백 명을 모집해 ‘브랜드 사절단’을 발족시켰고, 그들을 통해 각종 서비스에 대한 고객들의 목소리를 모니터해 불편사항을 즉각 시정했다. 그리고 미녀 테니스 선수 샤라포바를 비롯해서 로저 페더러, 피겨 요정 김연아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초청한 슈퍼매치나 일디보, 비욘세 등 세계적 팝페라 가수의 슈퍼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각종 이벤트를 열어 현대카드 고객들만을 위한 ‘특별한 경험’을 제공했다. 그렇게 하여 결국 현대카드는 ‘M’ 출시 2년 만인 2005년에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카드의 네이밍, 고객 선호도 조사, 차별화된 서비스 전략, 디자인, 브랜드 사절단, 콘서트부터 슈퍼매치 등의 프리미어 마케팅, 각종 매체를 이용한 광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카드는 2006년 말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S&P)에서 아시아권 카드사 최초로 트리플 B를 받았는데, 이는 현대카드의 기업가치가 제1금융권 수준으로 성장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발 없는 맛이 천 리 간다 - 청정원 홍초
웰빙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식초음료 시장은 약 400억 원 규모로 성장했는데, 그 가운데 식초음료의 원조 격인 청정원의 홍초는 60% 이상의 경이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시장 선도 기업으로서의 프리미엄을 톡톡하게 누리고 있다. 하지만 청정원은 처음 홍초를 개발하고 나서 소비자들로부터 OK 사인을 얻기까지 고된 통과의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식초는 음식 맛을 내는 첨가제였지, 음료수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98년 청정원이 마시는 식초를 표방하며 홍초를 내놓았을 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일본에서는 인기 있는 웰빙 상품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쉽게 입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청정원은 절망하지 않고 식초음료의 천국인 일본에 직원을 파견해 더욱 면밀하게 제품조사를 실시하고, 일본의 기술자를 초빙해 일본전통 발효법을 배웠다. 그러한 엄청난 노력으로 청정원 개발팀은 마시는 식초의 제조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개발팀은 국민들의 식초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극복해야 했고, 또 새로운 음료용기라인을 만드는 일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식초의 대량발효와 유통문제 등 산 넘어 산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장애물은 역시 식초는 조미료라는 인식이었다. 당시 음료시장에는 웰빙 분위기로 인해 검은콩, 검은깨 등 색깔과 건강을 연결하는 일종의 컬러마케팅이 유행이었고, 청정원도 붉은 감식초를 시판하고 있었기에, 청정원의 신제품 바람몰이는 자연스럽게 붉은색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확실한 목표를 설정한 청정원은 20대 후반~40대 초반의 주부 모니터 요원을 통해 관능검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감식초는 더욱 세련되고 매혹적인 빛깔로 바뀌었다.
청정원 마케팅팀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양손에 홍초를 들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고, 청정원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에게 홍초를 권하고 마시게 했다. 그런데 한 번 홍초를 맛본 사람들은 반드시 홍초를 다시 찾았다. 마케팅팀은 자연스럽게 홍초의 효능이 입소문으로 퍼지기를 기대했다. 다행히 건강한 몸매를 원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식초가 최고의 음료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녀들의 즐거운 수다를 통해 홍초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아가 청정원은 타깃인 젊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S라인의 소유자인 한채영, 김아중 등 8등신 미녀들을 TV광고모델로 활용했다. 또 마케팅팀은 입소문을 전국으로 퍼뜨리기 위해 트럭을 카페처럼 개조한 다음, 시도 때도 없이 전국의 피서지, 대학가, 고시촌 등을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미친 듯이 24개월을 뛰어다니고 보니, 식초는 맨입에 먹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거짓말처럼 깨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속적인 매출 창출을 위해 다양한 계층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홍초를 홍보해 나갔다. 예로 마케팅팀은 아이스크림, 케이크, 셔벗, 얼음 등 다양한 레시피를 개발해 전파하는 데 주력했고, 또 온라인 아카데미를 만들어 수료증을 증정하기도 했으며, 홍초 홈 파티, 홍초 카페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카페에는 회원들이 올린 홍초를 이용한 사진들이 줄을 이었고, 리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유가 생긴 마케팅 팀원들은 밤의 주인공인 주당들에게 시선을 돌렸고, 식초는 본래 피로회복과 간 기능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착안해, 팀원들은 마시는 홍초를 회식 도중 소주와 섞어 마셔 보았다. 그 결과 취기도 늦게 올랐고, 평소 2병을 마시던 사람이 4병을 너끈히 마셨다. 그때부터 회사의 전 부서에서는 회식 때 홍초부터 챙기는 것이 기본이 되었고, 이 현상은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갔다. 그렇게 하여 신맛의 조미료에 불과했던 식초는 마시는 식초에서 맛있는 식초로, 나아가 남녀노소의 건강을 돕는 팔방미인으로 진화하게 되었고, 결국 홍초는 출시 9개월 만에 1백억 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2006년에는 총 240억 원 매출을 달성해 음료시장의 블루오션을 정복했다.
역발상으로 틈새를 노려라 - 매일유업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2003년 국내 가공유 시장은 몹시 시끄러웠다. 딸기 우유, 바나나 우유 등 가공유에 당분이 너무 많이 들어가 소비자들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언론의 지적 때문이었다. 특히 음료에 과일 빛깔을 내는 색소의 유해 여부가 연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7월부터 매일유업 기획팀에서 하반기 신제품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발팀의 팀원들은 얼어붙은 가공유 시장에 어떤 방법으로 도전해야 할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발팀의 이인기 과장은 유치원생 딸이 그린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왜 반달을 빨간색으로 칠한 거니?” “아빠, 이건 반달이 아니라 수박이에요.” “수박? 수박은 파란색이잖아.” “에이, 아니에요. 수박은 원래 속이 빨갛잖아요.” 그 순간 이 과장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회의석상에서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우리 색깔이 하얀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 봅시다.” “하얀 바나나 우유? 바나나는 노랗잖아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껍질은 노랗지만 속은 하얗잖아.”
그때까지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바나나 우유는 껍질 빛깔처럼 노란색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바나나 우유는 노란색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과장이 내놓은 아이디어의 초점은 역발상에 있었다. 이인기 과장의 아이디어는 팀원들 사이에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기존 제품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깨뜨리려면 엄청난 투자가 따라야 하고 성패 여부도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상토론 끝에 팀원들은 당분간 색소의 유해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색소를 뺀 우유로 도전한다면 경쟁력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해서 신제품 개발이 결정되었다.
신제품 개발이 확정되자 본격적으로 제품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저지방에 무설탕에 갈변 없는 과즙까지, 순수한 바나나 우유를 만드는 과정은 실로 난관의 연속이었다. 산고 끝에 2006년 12월 6일,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가 탄생했다. 고객에게 솔직하게 다가서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바나나 우유였다. 하지만 회사 경영진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이하 ‘바ㆍ하’로 표기)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책정된 광고비는 겨우 5억 원, 실패를 예감한 최소한의 투자였다.
개발팀은 이제 마케팅이라는 산까지 넘어야 했다. “‘바하’의 타깃은 젊은층, 그렇다면 비상구는 인터넷밖에 없다.” 본래 과일향이 들어간 가공유의 고유 타깃은 초ㆍ중ㆍ고등학생들이었지만, ‘바ㆍ하’는 중고생과 대학생으로 올려 잡았는데, 그들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인터넷 UCC였다. 그렇게 해서 2006년 여름, 개발팀은 뜨거운 열정으로 ‘바ㆍ하’의 UCC 광고 제작에 돌입했다. “에이, 바나나가 어떻게 하얘?”라는 광고의 내용은 실로 파격이었다. 고객들의 관점에서 자사 제품을 네거티브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진정성을 고객들이 알아주리라 굳게 믿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UCC는 전국 극장의 영화상영 전 광고시간을 활용해 선을 보였고, 연이어 인터넷에 유포되었다. 그러자 반응은 예상 외로 엄청났다. 처음 내놓은 제품, TV 광고에서 본 적도 없는 제품 UCC에 하루에 댓글이 100여 개가 넘게 올라왔다. 감격한 직원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2006년 12월에 ‘바ㆍ하’가 출시는 됐지만, 영업점들이 제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한 병 더’ 행사가 추진되었다. ‘바ㆍ하’에서 ‘한 병 더’라는 글자가 새겨진 뚜껑이 나오면 공짜로 한 병을 더 주는 행사였다. 여기에 참여한 슈퍼마켓에는 물건을 20% 더 공급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장에서 또 하나의 장벽은 1,000원이라는 비싼 가격이었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업팀 직원들이 곳곳에 돌며 판촉물 행사를 벌였고, 각종 행사에 ‘바ㆍ하’를 협찬했다. 그 결과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는 출시 초기 월 2억 원도 안 되던 매출에서 7개월 만에 판매량 2,500만 개, 월 20억 원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독특한 발상이 가져다 준 가공유 시장의 일대 돌풍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 마케팅의 정수 - LG텔레콤 기분존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건곤일척 맞붙어 싸우는 이동통신시장은 한순간에 생사가 좌우되는 죽음의 전장이다. 서비스 하나에 수십만 명의 가입자들이 영광의 탈출을 감행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서비스로 응수한다. 이러한 이동통신시장에서, 2006년 당시 LG텔레콤은 경쟁사인 SKT와 KTF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인해 고객 유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LG텔레콤의 IMC팀은 사내 전략회의실 ‘놀이터’에서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요금을 낮춰 기존 고객은 지키고 신규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한쪽에서 아이디어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휴대폰 요금이 집 전화보다 더 저렴하다면…….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그것은 당시 통신업계의 기술력이나 시장 상황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감히 그 의견을 현장에 적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신개념 요금제 서비스인 ‘기분존’의 런칭에 들어갔는데, 무엇보다도 혁신적인 서비스로 포지셔닝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유선사업자들의 반발이 예상되었지만 그 정도의 분쟁은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서비스를 위해 무선망 구축, 전용 단말기 개발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하나 둘씩 풀어나가야 했는데, 그 방법을 찾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무선 기술에는 단말기와 다른 제품 간에 실시간 통신이 가능한 블루투스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기분존 서비스의 요체는 블루투스가 서로 반응하면서 특정한 지역에 있는 LG텔레콤 기분존 서비스에 가입한 고객을 확인해 준 다음, 그들 고객이 미리 등록한 특정구간에서 통화를 할 경우 유무선을 막론하고 집 전화보다 싼 혜택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실용화하려면 휴대폰과 휴대폰을 교신할 중계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중계기가 ‘알리미’였는데, 알리미 도달 범위는 설치 지역 기준 반경 30m 이내로, 웬만한 가정에서는 자유롭게 통화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유선전화 못지않은 파격적인 저렴한 요금의 기분존 서비스가 본격화되자, 예상대로 유선전화 회사인 KT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LG텔레콤은 이런 KT의 민감한 반응이 오히려 고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판단하고, ‘기분존’의 경쟁자를 아예 공룡업체라고 할 수 있는 KT로 상정하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는데, 바로 회심의 스토리 마케팅 전략이었다. 첫 번째 작전으로 최대한 유치하게 만들어진 집 전화 가출 전단지(전단지에는 “가출한 집 전화를 찾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음)가 호외처럼 거리에 살포되었고, 얼마 후 그 전단지 속에 있던 집 전화 인형들이 도심 한복판에 나타나 “기분존 때문에 우리가 갈 곳이 없어요”라며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했고, 심지어 자기 몸에 달린 수화기를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이처럼 황당무계한 거리 퍼포먼스는 감각적인 청소년층에도 크게 어필했으며,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담은 버즈 마케팅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집 전화들은 TV CF를 통해 태국으로 밀항하고야 말았다.
마침내 기분존 서비스의 실체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시간을 꼬박 통화해도 780원, 엄청난 가격 할인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결국 2006년 5월부터 시작된 새로운 개념의 집 전화 대용 휴대폰 요금제 ‘기분존’은 8개월 만에 15만 명의 가입자를 유치했다. 또 캠페인 가동기간 동안 22%의 인지도 상승효과까지 얻었다.
LG텔레콤은 2006년 하반기 KT의 소송으로 주춤했던 기분존 서비스에 대한 마케팅을 2007년 들어 다시 시작했는데, IMC팀에서는 ‘기분존’의 집 전화 가출 이벤트 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당시 ‘기분존’의 타깃은 휴대폰을 많이 쓰면서 혼자 사는 2030층이었는데, 실제 서비스 가입자들 중에는 가정주부가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LG텔레콤은 주부들 가운데 가장 구매력이 있는 3040 전업주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요소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끄집어낸 비밀의 코드가 바로 ‘수다’였다. IMC팀은 좀 더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사이트를 개설한 다음 “당신에게 수다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간단한 이 질문에 주부들은 무려 10만 개의 글로 호응해 주었고, 그들의 글에서 정리한 수다의 법칙은 3편의 ‘기분존’ 광고에 접목되었는데, 수다를 많이 떨면 떨수록 가족이 행복해진다는 콘셉트의 광고였다. 광고가 나가자 주부들은 집 전화보다 싼 기분존 서비스에 가입한 다음 휴대폰을 들고 마음껏 수다를 떨었고, 결국 LG텔레콤은 2007년 8월 13일 기준 누적 가입자 수 40만 명을 돌파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숫자 마케팅으로 승부하라 - 애경 2080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된 치약은 럭키치약의 장기집권기를 거쳐 90년대에는 유수의 업체들이 시장을 분할 지배하고 있는 형국으로 바뀌었고, 각 회사별로 많은 히트상품을 양산했다. 그런데 IMF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고가의 미백용 치약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중저가 가족형 치약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를 일찌감치 파악한 애경은 신속하게 중저가에 고성능이라는 소비자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치약 개발에 돌입했는데, 이전과 전혀 다르면서도 친밀도를 느낄 수 있는 치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향미를 찾아내야 했다.
치약 개발이 시작되자 애경의 향료 개발팀에서는 치약의 주재료와 함께 사카린나트륨이란 감미제를 다양한 비율로 배합한 다음, 연구소 내부 직원을 총동원하여 평가를 실시했는데, 온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범용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만큼 자칫 재료의 부조화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쓴맛과 단맛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울러 새로운 치약은 충치, 잇몸질환, 구취라는 구강질환의 삼총사를 모두 예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후 3대 질환을 잡는 데 성공한 연구팀은 기존 제품과 차별적인 요소 개발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바로 이산화규소를 사용한 연마제였다. 그리고 이산화규소를 이용하여 기존 제품과 차별화에 성공한 연구팀은 내용물의 시각적 효과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투명과 불투명의 두 줄 무늬가 나란히 나오도록 함으로써 고객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신제품의 내용물이 완성되자 다음 과제는 네이밍이었다. 수차례 조사와 협의를 거쳐 발음 용이성, 기억 용이성, 정서적인 면을 고려해 신제품의 이름은 2080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20개의 건강한 치아를 80세까지’를 약속하는 제품 콘셉트를 브랜드 슬로건화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2080 치약이 탄생했다. 애경의 20280 치약으로 비롯된 숫자 브랜드는 비타500, 여명808 등과 같은 기업 브랜드들뿐만 아니라, 소규모 음식점들까지 흉내 낼 정도로 선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애경의 독특한 발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애경은 2080 광고에 다보탑과 첨성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여주며, 2080을 사용하면 당신의 치아도 천 년을 버텨온 문화재처럼 오랫동안 꿋꿋할 수 있다고 소리쳤는데, 이 기발한 광고는 2080 판매 이익금의 일부를 문화재 보수와 관리기금으로 기증함으로써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고객은 제품이 아니라 제품이 주는 이미지를 구매한다는 고전적인 마케팅 이론의 관점에서, 고객들에게 보다 차별화되고 세분화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소비자들은 애경을 애국적인 기업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2080역시 같은 느낌으로 즐겁게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경의 공식 마케팅 전략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국민치아건강 운동을 벌이며 대한구강보건협회와 함께 ‘학교구강보건교육사업’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는데, 애경은 이렇게 공익성 있는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국민들의 건강도 챙기고 좋은 기업이미지에 매출까지 상승시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 경영진에서는 이 효자상품 2080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인 동시에 뜨거운 감자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까지 변화무쌍한 치약 분야에 전념해야 할지가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다가 애경은 2080브랜드 이미지를 보다 역동적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웰빙 바람으로 생얼, 치아미인 등의 독특한 트렌드가 생겨나고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소비자들은 치실이나 치간 칫솔 등 전문적인 제품들을 찾기 시작했고, 2080의 새끼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애경 연구실에서는 여러 종류의 치실, 칫솔, 구강청결제 등 다양한 제품의 샘플을 산처럼 모아놓고 전문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경은 2080 덴탈 클리닉이라는 브랜드로 다양한 제품들(칫솔, 구강청정제, 치실, 기능성 치약 등)을 내놓았는데, 이 제품들은 브랜드 이미지에 편승하여 큰 광고 없이도 높은 매출로 이어졌다. 오늘도 애경은 ‘다산은 미덕’이라는 믿음 하에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하게 고수하면서 2080 시리즈를 확실한 국민의 치아건강 시리즈로 만들겠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다.
새것이 아니면 모두 버려라 - SHOW
국내의 이동통신시장은 KTF와 SKT, 두 마리의 공룡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형국인데, 1세대부터 시장을 선점해온 SKT의 아성은 너무나 견고해 업계의 순위는 좀처럼 바뀔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2005년 여름, KTF의 임원진은 비장한 결심을 하였고, 경쟁사들에 한발 앞서 차세대 시장 개척에 나섰다. 캐치프레이즈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를 이끌고 노량진해전에 임하면서 외쳤던 ‘생즉필사 사즉필생’이었다. 그때부터 직원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브랜드를 탄생시키기 위한 이노베이션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사고의 영역을 제한하는 어떤 규제도 없었고, 회의실에서는 절차나 계급이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팀원들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사소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때론 매서운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또 협력사나 광고대행사 직원들과도 자주 모임을 갖고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당시 3세대 이동통신을 상징하는 네이밍이 우선 시급했었는데, 6개월 동안의 고심 끝에 최종 후보로 SHOW 외에 비욘드(V-yond), 왓(What), 더블유(W), 윙(Wing) 등이 올라왔고, SHOW가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보고 느끼고 즐긴다는 뜻에서, 또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SHOW만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브랜드 명이 확정되자 본격적인 마케팅 작전이 개시되었다. 어느 날 TV에 청순하게 생긴 여성이 나와 극장 앞에서 막춤을 추는가 하면, 갑자기 버나드 쇼의 묘비가 나타나고 백남준 선생의 퍼포먼스도 등장했다. 심지어 난자를 찾아가는 정자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멘트가 ‘쇼를 하라’였다. 사람들은 이 엽기적이면서도 눈길을 뗄 수 없는 광고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무도 그 광고의 정체를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고도의 블라인드 마케팅 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CF 제작에는 그동안 비즈 회의에서 나온 엽기적인 아이디어가 총동원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CF들은 일반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감각적인 네티즌들을 자극했다. 곧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에 그들이 만든 패러디 UCC가 넘쳤다. 소비자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KTF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 일색이었다. 광고에 이어 쇼당 창당 이벤트, 쇼당 프로모션 개최, 프로야구 개막전 SHOW 가두캠페인, 천자문 카페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거침없이 등장했고, 그들은 그렇게 진짜 쇼를 했다. 왜냐하면 당시 이동통신 가입자의 30%를 차지했던 20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함께 놀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SHOW가 3세대 이동통신 브랜드임을 공개하자 인터넷 검색 순위는 급상승했고 가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SHOW는 런칭 한 달째인 4월 들어 고객이 516% 증가했고, 7월에는 가입자 100만 명을 돌파하면서 3G 시장에서 사상 처음 가입자 역전극이 벌어졌다.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2008년 4월에는 런칭 1년여 만에 SHOW 가입자가 500만 명을 돌파했다.
한편 KTF의 SHOW가 고객들에게 보다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 이면에는 교통, 멤버십, 뱅킹, 증권 등의 서비스를 하나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유심(USIM)카드가 있었는데, 그것은 비동기 3세대 이동통신의 단말기에 삽입되는 스마트카드로, 사용자 인증, 글로벌 로밍, 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기능을 한 장의 카드에 구현한 기술이다. SHOW는 기존의 안정적 기반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을 뿐 아니라, 그 전략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이동통신시장의 새 장을 열 수 있었다.
국내 오리지널 캔버스화의 자부심 - 스프리스
1995년 10월, 명동의 15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다섯 명의 남자들이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세재 사장과 스프리스 창업 멤버들이었다. 오랫동안 제화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은 당시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개념의 운동화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에 BB화라고 부르던 캔버스화에 주목했다. 캔버스화는 당시 유행하던 스니커즈보다 가격 경쟁력이나 자재, 생산기간 면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어 청소년층에게 더 어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문제는 이미 국내에 외국산 캔버스화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고,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활동성과 패션 감각을 동시에 갖추어야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96년 2월, 스프리스는 금강제화의 자체유통 브랜드로 출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메인 타깃을 18세에서 23세로 잡고, 시판되는 캔버스화의 선호도, 적정 가격, 착용 기간 등 다양한 소비자 리서치를 실시하고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직원들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학생들이 신발을 정사이즈보다 크게 신는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수입 캔버스화가 한국인의 발 모양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흔히 신발은 디자인이 예쁘면 발이 불편하고 발이 편하면 예쁜 디자인이 나오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프리스 직원들 사이에서도 무엇을 중점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고갔고,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신발을 만들어 보자는 원대한 목표를 정했다. 직원들은 30년 경력의 베테랑 기술진과 함께 연구를 거듭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는데, 다행히 우리와 발 모양이 비슷한 일본의 기술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캔버스화 생산에 들어가면서 스프리스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국내생산 시스템을 고수하고, 재생고무를 사용하는 외제 캔버스화가 마모가 심해 제품 수명이 짧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 재생고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또 기존 운동화에 사용되는 것보다 2배 이상 강력한 접착력에 발 냄새와 세균의 번식을 방지해주는 새니타이즈 원액이 혼합된 접착제를 개발해 사용했고, 디자인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한국형 캔버스화를 탄생시켰다. 이렇듯 디자인과 품질을 모두 만족시킨 스프리스의 캔버스화는 업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스프리스가 처음부터 최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창립 초기 스프리스는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100년 전통의 미국 캔버스화 전문업체 컨버스와 제휴한 다음, 국내 최초로 멀티스토어를 열었지만, 스프리스는 2년 동안 영업 손실을 기록하며 신생기업으로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스프리스는 다른 기업들처럼 중국이나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지 않고 국내 생산을 고집했다.
그런 가운데 2004년 큰 위기가 찾아왔다. 협력업체인 미국의 컨버스 사가 재계약을 협의하면서 자신들의 상품에 대한 로열티를 인상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신발 가격의 상승은 물론 대리점 마진도 떨어지는 등 회사가 감수해야 할 손실이 너무 많았고, 반면 본사가 컨버스 사와 결별을 선언할 경우 부도가 날 것이라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2004년 12월 회사는 컨버스 사와의 재계약을 파기했다. 그러자 멀티스토어의 매출은 급전직하했고 신발 가격을 올리자는 목소리도 높아졌지만, 스프리스는 “우리는 절대로 고객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겁니다”라며 서민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장에는 고객과 약속된 가격표가 더 도드라지게 붙었고, 합리적인 가격정책의 일환으로 해외 수입 제품의 경우 경쟁업체보다 질 높은 제품을 더 싼 가격에 입점시켰다. 이런 진심이 통한 것일까. 서서히 고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프리스를 캔버스화의 제왕으로 등극시킨 마케팅 전략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들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청소년들을 즐겁게 해주고 신발을 광고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문화의 장, 새로운 놀이문화를 만들어 주는 작업이었다. 예로 기획 프로그램 ‘스프리스 반을 찾아라’라는 유명 연예인이 학교에 직접 찾아가는 이벤트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신발 증정, 철새도래지 탐방, 청소년 선도 야영캠프, 북한 난민 보호소 만들기 행사를 벌였다.
또한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릿이나 화이트데이의 사탕, 빼빼로데이의 빼빼로 등 고객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기발한 사은품을 개발해 젊은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런 다양하고 능동적인 마케팅 전략은 컨버스와의 결별로 닥친 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굴지의 스포츠 브랜드인 에버라스트와 손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스프리스는 민감하고 변덕스러우면서도 순수한 젊은 고객들의 감성 안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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