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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상식의 허와 실 (도서요약)

by 홍승환 2007. 10. 31.

경제상식의 허와 실

- 시장경제원리로 읽는 -

 

 

1부   우리 경제, 무엇이 문제인가

 

균등분배를 하면 모두 잘 살게 될까? - 마라톤을 하면 답이 보인다

지난 2년여 동안 우리나라는 참여정부가 지나치게 형평과 분배 위주의 이념과 정책에 경도되어 시장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왜 공평하게 더불어 잘살겠다는 형평과 분배우선 정책이 경제발전에 부담이 된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시장경제는 마라톤 경주와 같기 때문이다. 2시간 여의 시간 동안 끝없는 경쟁 속에서 양지가 음지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되면서 순위 경쟁을 벌인다. 이러한 경쟁의 압력이 더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면서 1등은 물론 꼴찌까지도 사력을 다해 경쟁하게 된다. 시장경제의 이치 중에 가장 중요한 이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장에서는 1등과 꼴찌가 있게 마련이며, 모두 다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차별이 생기며 서열이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차별화에 따른 차등적 보상 원리가 모든 사람을 보다 더 열심히 살게 만들고 나아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가져오는 힘이 되는 것이다.

 

결국 시장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게으른 자를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돕지는 않는다. 마라톤 경주도 항상 열심히 달려서 우승하는 자에게 영광을 주지 꼴찌에게 영광을 주지는 않는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평등하지 못한 세상의 이치를 몸에 익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세상의 이치에 등을 돌리고 마라톤 골인지점에 모두가 손잡고 나란히 들어오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이상은 좋으나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기 때문에 실패를 피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분배 위주의 정책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여 1등이나 꼴찌 모두 똑같이 대접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결국 남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시장경제의 정체와 평균소득의 하락을 피할 수 없다.

 

투기 근절, 마땅하다?

부동산, 원유, 원자재 등의 가격이 급등했을 때 가격변동의 원인 중 하나로 매번 거론되는 것이 바로 투기이다. 투기를 사회의 골칫거리로, 발본색원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투기란 용어에 불법적 색채를 너무 덧칠해 놓은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언론에 의혹으로 보도된 이들의 행위는 내부정보를 이용한 불법적 사기행위인데도 죄목은 생뚱맞게도 투기였다. 이 같은 적절치 못한 용어의 사용은 우리 사회에 투기를 사기행위와 동일시하는 잘못된 개념으로 고착시켜 놓았다. 투기를 근절해야 한다고 하는 또 다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투기가 설사 합법적인 경제행위라 할지라도 실수요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투기가 실수요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메커니즘은 가격상승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투기가 실수요자들에게 피해를 준다라는 혐의를 벗으려면, 우선 투기가 가격상승의 원인이 아님을 보여야 한다. 경제학에서 투기는 가격의 상승 혹은 하락을 예상하여 기대수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시장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투기는 가격 상승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가 가격상승의 원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경제학적 정의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렇다. 혹자는 투기가 가격상승의 1차적인 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가격을 추가적으로 확대시키는 2차적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투기가 없었더라면 가격이 안정적이었을 것이라는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타당성이 부족하다.

 

오히려 시장만 경쟁적으로 작동된다면 투기는 균형가격에 빠르게 도달하게 해줌으로써 급격한 가격변동을 사전에 분산시켜 실수요자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일례로 중동의 정정(政情)불안 등에 따른 원유수급 불안정으로 3개월 후 국제유가가 급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고 하자. 투기적 거래로 인해 유가상승의 일부가 현 시점으로 앞당겨지면서 정작 3개월 후에는 유가가 그다지 많이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투기자가 존재함으로써 실수요자는 원유확보의 부담과 함께 예상과는 다른 가격변동에 대한 위험을 모두 회피할 수 있게 된다.

 

투기는 근절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자산시장에서 자산이 제대로 된 균형가격을 찾도록 도와주고 시장의 위협을 소화하는 매우 유익한 역할을 수행하는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주어진 사실을 정확하게 보아야 문제가 해결됨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사실적으로 보지 못하면 잘못된 해결책이 나온다. 이제는 투기꾼들이 챙기는 소득만 보지 말고 올바른 투기가 수요 공급을 원활히 하는 기능이 있음을 사실적으로 보아야 한다.

 

본 고사와 고교등급제, 왜 필요한가

국가가 교육에 개입하는 배경에는 교육은 일반상품과는 다르므로 시장에 맡길 수 없는 특수한 것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흔히 교육은 공공성을 가지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기회의 평등이라는 믿음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공공성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읽고(Reading) 쓰고(wRiting) 셈하는(aRithmetic), 이른바 3R 교육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 이상의 고등교육은 모두 자신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며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내용 없는 껍데기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과 방법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기회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거나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희소한 자원의 낭비를 초래할 뿐이다.

 

교육이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로 이행될 경우 다양한 교육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학교가 출현할 것이며, 교육소비자는 자신의 능력과 기호에 맞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교육계는 영합의 게임이 아닌 양합의 게임 세계로 옮겨갈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국가 주도 교육의 결과 피폐해진 교육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등록금을 부과하는 등 민영화의 길을 검토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지식강국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교육의 자율화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본고사 부활과 고교등급제를 불허하면서 개인간, 대학간, 고등학교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한국교육의 경쟁력은 높아질 수 없다. 학교는 일차적으로 교육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은 교육시장에서 학교간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다.

 

서울대만 배부르다

일반적으로 국가가 대학교육을 지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대학교육이 사회에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학교육의 외부효과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국립대학의 설립과 운영의 명분인 셈이다. 그러나 두 번째 주장은 의심스럽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사교육의 양과 질이 결정되고 사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학생들이 서울대에 많이 들어갔다는 최근의 연구결과는 국립대학의 운영이 평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의심스럽게 한다. 사회적으로 이미 풍요로운 혜택을 누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은 어떤 이론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국가권력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 부자들의 교육비로 사용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역할이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이라면 서울대를 비롯하여 전국의 국립대학을 사립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립대학에 투자한 교육예산을 상대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이 혜택을 보고 있는 보통 교육기관에 투자해야 한다. 국가에 의한 교육지원은 상급 교육기관이 아니라 가장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하급 교육기관부터 상향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재정형편을 고려한다면 모든 국립대학을 사립화하고, 제한된 교육재원은 대학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지원되어야 한다. 또한 아직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는 대학진학의 기회가 막혀 있기 때문에 국가는 국립대학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다른 방법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들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무료지원이 아니라 졸업 후 취업하여 학자금을 상환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는 비정하다?

사람들은 시장경제를 처절한 경쟁,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냉엄한 현실, 약육강식의 법칙, 극도의 이기주의 등과 연결지어 생각한다. 사람들의 인식처럼 시장경제가 그렇게 비정한가?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효율이라는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다. 경쟁은 이처럼 시장경제의 핵심적인 구동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은 시장경제가 비정하다는 인상을 주는 원흉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패자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장경제에서 경쟁의 원리를 제거 혹은 완화한다면 이러한 고통이 없어질까? 예상되는 불행의 정도를 안다면 오히려 경쟁이 있음을 감사할 일이다. 하나의 일자리를 가진 회사와 두 명의 구직자를 상상해 보자. 경쟁이 없다면 제비뽑기 등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불행하게도 경쟁력 있는 구직자가 탈락한다면 승자 1패자 2인 상황이 된다. 비정함을 느끼는 사람(패자)이 증가하며 사회적 효율성도 저하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시장경제가 비도덕적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1776년에 발간된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사익의 추구가 결국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공공이익에 기여하게 된다고 했다. 시장경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가로서, 노동자로서, 생산자로서, 소비자로서 재화와 용역들을 공급하고 수요한다. 이러한 행위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다.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고 개인들의 이기심으로 혼탁해질 것 같은 시장경제가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양심과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단, 이 같은 존재가 멀리 있거나 편견에 가득 찰 경우에는 사회적 폐해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폐해는 시장경제가 형성되지 않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속되어 왔을 뿐 아니라, 다른 경제체제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시장경제가 비정하고 비도덕적인 시스템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과점은 언제나 비효율적인가

경제학에서 과점은 특정시장이 소수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을 말한다. 한 시장에서 많은 기업이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선두그룹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이 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가격 및 품질 경쟁을 주도하면서 시장이 성숙된다. 이 그룹에 끼지 못한 기업들은 정상적인 시장경제에서는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소수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우 초기 성숙되지 않은 시장에서 많은 기업이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 비해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 효율적 기업들이 지배하는 성숙된 시장에서 소비자의 만족도도 더 높을 것이다. 물론 다수의 기업이 존재하는 시장에서 담합의 가능성이 낮은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과점시장에서 담합과 같은 반경쟁적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의 적절한 시장감시가 이루어진다면 성숙된 과점시장에서도 경쟁압력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며 시장의 효율성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경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인해 약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정서가 우리 사회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정서가 경제부문에 잘못 확산되면 시장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단순히 한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기업들의 숫자로 그 시장의 효율성을 측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상위 몇 개사가 시장점유율의 상당부문을 차지하고 있어 과점의 폐해가 예상된다.는 식의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문제는 소수의 기업들간에 실질적인 경쟁압력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에 대한 지원 등 인위적으로 시장지배력을 분산시키기보다는 경쟁력 있는 기업들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될 수 있도록 시장기능의 효율성 제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되는 과점상태에 대해서는 경쟁압력이 지속적으로 시장에 존재할 수 있도록 시장감시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소기업 보호정책, 그들의 경쟁력을 높였나

최근까지 중소기업은 보호와 육성의 대상이었다. 중소기업 지원에 관한 한 우리나라만큼 다양하고 체계적인 지원정책을 실시하는 나라도 많지 않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나라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중소기업이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것보다는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하는 방향이었다. 중소기업은 경제적인 약자이고, 대기업은 경제적인 강자라는 시각에서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추진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지원정책은 시장기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자원배분을 왜곡시키고 지나치게 보호적인 성격을 갖게 돼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그나마 최근 중소기업 정책의 기본방향이 보호, 육성에서 경쟁력 향상으로 전환되고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을 위한다는 취지로 추진해 온 보호조치를 걷어내고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정책방향을 보다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 부문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역동적인 시장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높은 창업률을 통해 시장경쟁도를 높이고 부실기업의 퇴출도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산업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경제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무엇보다 효율적인 생산자는 성장하고 비효율적인 생산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경제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중소기업의 창업률을 높이기 위해 창업단계의 규제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부 각 부처별로 산재한 창업관련 인허가를 대폭 감축시킴으로써, 신생기업이 시장에 진입하는 경우 겪게 되는 많은 단계의 행정절차, 창업시간과 비용을 줄여줘야 한다. 회생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은 기업개선을 유도하고 회생가능성이 없는 부실 중소기업은 신속하게 퇴출시켜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실기업의 발목잡기에서 탈피해 건전기업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규제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보장한다?

금융규제는 그 목적과는 달리 경쟁을 감소시켜 오히려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금융시장의 안전성을 훼손하고 있다. 1998년 6월 금융감독위원회가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에 대해 퇴출조치를 단행했다. 이때 가장 부실한 금융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던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퇴출시키지 않고 존립시켰다. 게다가 최근 부실 카드사들을 퇴출시키지 않은 것은 정부의 조기개입과 적기퇴출 정책이 결정과 규제의 관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과는 달리 검사감독과 조기개입 및 적기퇴출 제도와 같은 건전성 규제는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금융시장의 안전성을 위한 효과적인 제도가 아니다.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정부의 힘에 의존하기보다 시장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

 

시장의 힘에 의존케 한다는 것이 정부가 금융시장에서 손을 떼라는 말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정부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제고한다는 명분 하에 금융기관에 대해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역할을 하라는 말이다. 규제당국은 조직과 기능을 축소하고 최저자본금, 자기자본비율 등 금융기관의 건전성에 필요한 기본원칙이 잘 지켜지는지의 여부만을 검사, 감독해야 한다. 그리고 규제당국의 역할은 투자자나 예금자들에 의해서 금융기관이 감시, 감독될 수 있도록 금융기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 시장에 공개하는 서비스에 충실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금융기관이 시장의 힘에 의해서 규제되어 금융기관의 건전성은 훨씬 높아질 것이며 금융시장은 안정될 것이다. 또한 금융기관은 경쟁적 시장에서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2부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다

 

개인에게 주식투자는 위험하다?

그동안 우리 주식시장이 오랜 불안정한 시기를 거치면서 투자자들도 단기시세 차익만을 노린 측면이 많았다. 또한 내부정보를 이용한 부당한 거래나 소위 작전이라고 불렸던 인위적 주가조작 등은 주식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낳았으며, 투자자들이나 증권사 직원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증시호황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식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무모한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자본시장 개방화는 IMF 위기를 거치면서 본격화되었고, 그 결과 외국인투자자가 우리 주식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의 극심한 부침에 따른 불안감과 피해의식 속에 지난 몇 년간 주식시장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고령화 추세로 종전보다 길어진 노후생활을 위해 안정적인 자산운용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는 높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성숙으로 인해 투자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땅한 투자대상을 찾고 있으며 주식은 바로 그러한 투자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위험하지 않은 투자는 없다. 투자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일정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며 미래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간 주식시장이 투명하지 못했던 측면이나 지나치게 급변했던 점들이 투자자들로 하여금 주식투자를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투자자들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한 수익을 노렸던 점도 주식투자를 위험하게 했다. 게다가 수수료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증권사 영업방식도 구조적인 문제점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극복할 때 비로소 개인투자자에게 주식투자는 무조건 위험한 행위가 아니라 기업활동의 성과를 공유하는 성숙된 경제활동이 될 것이다.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회적 규제의 문제점은 중복적인 규제와, 준수가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규제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업장 안정 규제는 노동부, 환경부, 산업자원부 등 5개 부처의 15개 관련 법률에 중복되어 걸쳐 있다. 안전점검을 수행하는 기관 또한 가스안전공사, 산업안전공단, 전기안전공사, 소방서, 시청, 경찰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점검의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개별 규제가 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 석유 화학업체가 한 해에만 40여 차례의 안전점검을 80일 동안 받았다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제문제이든 사회문제이든 규제로 인한 정부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규제를 만들 때 철저한 사전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규제는 그 정책목표가 이상적이고, 정책수단의 비용효과가 계량화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정치적 성격을 띠기 쉽다. 게다가 문제의 해결방법 역시 매우 감정적이고 대중주의적으로 흐르기 쉽다.

 

대부분 한두 건의 사건사고가 사회적 규제 신설이나 강화의 구실이 된다. 냉철히 생각하면 극히 이례적일 수 있는 일탈행위가 전체적인 문제로 비약되면서 모든 예상 가능한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경향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규제는 거의 예외 없이 비현실적이거나 불합리한 면을 드러내게 되며, 결과적으로 무리한 법 집행으로 많은 사람을 범법자로 만들거나 집행과정의 부정부패를 만연시킨다. 사고에 따른 사회적 비난여론에 밀려서 급조되는 규제는 법률이 정한 심사과정을 형식적으로 통과하게 될 우려가 크다. 선진외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하나의 조사에 6개월 이상을 투자한다고 한다. 세심한 분석 없이 서둘러 만들어내는 규제 치고 제대로 된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익이라는 명목으로 또는 여론에 영합하는 수단으로 사회적 규제의 강화를 외치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비현실적이고 질 나쁜 규제들을 먼저 줄여나가는 것이 순서다.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은 평행선?

대개의 환경문제는 크건 작건 간에 대부분 경제개발사업으로 인해 야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은 진정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원론적으로 따져보면 모든 개발사업은 환경친화적이지 않다. 이러한 개발사업들은 필연적으로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조건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사업들이 도처에서 추진되고, 생산을 위한 경제활동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개발 및 생산활동으로 인해 발생되는 편익이 환경보존으로 인한 편익보다 크다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인정되었다라고 한다.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모든 경제행위를 죄악시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이기라 할 수 있는 편의시설 또는 장치들을 모두 포기한 채 살아가야 한다. 환경보호 측면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원시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그동안 인류발전을 위한 노력을 모두 죄악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과 경제개발은 진정 병립할 수 없는 개념인가? 즉, 환경보호를 위해 경제개발을 중단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경제개발을 위해 환경파괴를 그대로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최근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련된 논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자연이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의 경제개발을 통해 환경과 경제개발이 조화를 이루게끔 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는 비단 자연환경뿐 아니라 개발에도 해당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환경보호와 경제개발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 없는 개념이다. 환경보호를 이유로 꼭 필요한 경제개발이 멈추어서도 안 될 것이며, 경제개발을 위한 환경파괴가 일방적으로 용인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평가하기에 따라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조화는 가능하다고 본다. 환경과 경제개발은 병립 가능한 것이다.

 

자본가의 이윤은 불로소득?

국어사전에서 자본가(資本家)라는 단어를 찾아보자. 사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 많은 자본을 보유하고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 혹은 노동자를 사용하여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 등 세 가지로 달리 정의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 정의에서 자본의 보유와 이로 인한 이익이 자본가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이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가 창출한 소득을 자본가가 부당하게 갈취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적대관계를 전제로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전근대적 농경사회의 지주-소작인 관계를 현대 산업사회에 잘못 대입한 결과로 나타난 오류이다.

 

하지만 자본은 토지와 기본적인 속성이 다르다. 첫째, 자본은 토지와 달리 존속이 보장되지 않는다. 즉, 자본가의 이윤은 수많은 생산과정 중 특정한 생산과정을 선택하는 리스크 부담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둘째, 많은 경우에 자본가는 기업을 경영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이 투입된 생산과정이 적절한 가치 창출에 성공하도록 하기 위해 종업원(노동자)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그들의 행위를 모니터링하고, 기업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들에 대한 의사결정을 한다. 더구나 산업사회에서 기업의 고용계약은 노동의 질적 차별화와 노동시장에서의 수급관계에 기초한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셋째, 기업의 실패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자본가의 몫이 된다. 결국 산업사회에서 자본가의 이윤은 불로소득도 아니며, 부당하게 노동자를 갈취한 결과도 아니다. 자본가의 이윤은 단순히 자본의 보유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선택과 경영행위 및 리스크 부담의 대가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건전한 이윤 추구야말로 최적 생산과정의 선택을 통한 효율적 자원배분을 달성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독점은 비난받아야 하나?

독점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힘없는 소비자의 몫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라기보다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독점의 발생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독점이 사회적 폐해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독점으로 인한 사회적 편익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막상 성공여부가 불확실한 기술개발 초기단계에 많은 자본을 쏟아 부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점이윤이 갖는 더 근본적인 효과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신기술이나 신제품을 개발하고 원가를 절감하고, 또 경영을 합리화시키는 강력한 유인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이윤추구 행위가 보장되는 환경에서 결과적으로 독점이윤이 발생할지라도, 기업은 성장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혁신에 정진할 수 있다.

 

현재 독점위치에 있는 기업은, 정태적 시각에서 보면 자원배분의 비효율성을 유발하는 등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동태적 시각에서 본다면 사회적 편익을 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폐해와 편익을 비교했을 때 반드시 독점의 폐해가 더 크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는 어렵다. 즉 현재 독점적 위치 자체를 문제삼기 전에 어떤 방법을 통해 그 위치를 달성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독점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 현재 존재하는 진입장벽이 부당하거나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종류라면 이러한 진입장벽을 제거하고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억지로 진입장벽을 제거하고 독점을 의도적으로 없애려 한다면 원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영업자가 탈세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근로자나 자영업자나 모두 같은 사람들이다. 더 정직한 사람들이 근로자가 되고 원래부터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영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근로자나 자영업자가 똑같이 정직하게 세금을 신고하는 상황에서는 자영업자는 매우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자영업자가 동일한 세제 하에서도 불리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자영업자의 소득이 근로소득에 비해서 매우 높은 변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변동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자영업자들을 불리하게 만든다. 평균소득이 같기 때문에 같은 세금을 부담한다면 실제로는 위험부담이 높은 자영업자들이 사실상 더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소득세의 초과누진제도 때문에 발생한다. 동일한 누진율을 적용받는다면 평균값이 같아도 변동성이 높은 쪽이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로자들의 소득은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되는 데 비해 자영업자들의 소득을 징세당국이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영업자들 중에서 정확하게 소득을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근로자들보다 현저하게 많아지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어쩌면 앞에서 말한 차별이 일부 자영업자들로 하여금 탈세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게 하거나, 일부 자영업자들이 탈세를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자영업자에게 제도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불공평하며 또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제도는 특히 정직한 자영업자에게 부당하고 과중한 벌을 내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영업자들을 탈세자로 취급하고 제도적으로 차별  하는 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의 원칙을 짓밟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기업은 투명할수록 좋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투명경영이 경제계의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정부에서는 분식회계, 허위공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등 기업경영의 투명성 부족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이거나 최소한 외환위기를 심화시킨 요인으로 진단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회계제도를 국제수준으로 높이고, 공시의무를 강화하는 등 강도 높은 제도개혁을 추진해 왔다. 이러한 조치들은 기업의 경영활동과 관련된 정보의 공개 또는 공유를 통해 우량기업에 대한 투자자금 유입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또한 기업에 대한 시장의 감시기능을 높여 기업경영 효율화를 유도하는 순기능도 있다. 기업지배구조의 문제가 기업과 투자자 간 정보 비대칭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경영투명성 제고는 이러한 비대칭을 해소함으로써 자원배분을 개선하고 기업의 효율성을 높여 건전한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게 된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의도된 대로만 진행되지도 않는다. 이른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투명경영을 위한 제도개혁의 경우에도 뜻하지 않은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다. 기업들이 증시상장을 기피하고 이미 상장된 기업들이 상장을 철회하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차라리 비공개 기업이 되어 회사의 경영 실적과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부담을 덜고, 주주나 애널리스트 등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는 다른 불만의 소리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총수 및 친인척의 지분보유 내역을 계열사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공개했기 때문에 적대적 M&A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세한 지분구조 공개는 외국계 펀드의 국내기업 사냥을 돕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편,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면 기업가치가 오히려 하락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다. 기업가치는 유리한 정보보다 불리한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경영투명성이 제고될수록 기업은 더욱 위험을 회피하게 되고 경영을 더 보수적으로 하게 된다. 투명성 제고가 결국 투자를 위축시키고 역동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기업경영도 무조건 투명할수록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적정 투명성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수준을 넘어 과도한 투명경영을 강요한다면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되고 투자를 기피하게 되며, 결국 자본시장에 남아 있는 기업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맑은 물에서 물고기를 찾아보기 어렵듯이.

 

사회보험제도는 저소득층을 위한 제도인가

사회보장제도가 양적, 질적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반면 빈부의 격차라든지 사회적 소외계층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정부가 빈곤대책으로 사회보험제도의 혜택을 넓혀가고 있다지만 이 때문에 빈곤층이 혜택을 보았다거나 사회보험의 혜택을 받은 눈물겨운 기사는 찾기 힘들다. 사회보험은 성실히 납부한 사람만 혜택을 받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혜택이 전혀 없다. 따라서 저소득층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이다. 더구나 보험료로 납부하는 금액이 적어서 수혜대상이 된다고 해도 수급액이 절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경우 40년 근무해서 60%의 소득을 얻는다고 하지만, 40년 근무할 수 있는 계층은 거의 없다. 의료보험도 마찬가지다. 병원에 가면 본인부담이 있고, 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비보험진료도 있다. 이것은 모두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보험을 100% 적용 받는다고 해도 결국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갈 수 없다. 저소득층은 병원에 가면 그날 일을 못하니 더욱 병원 갈 엄두가 안 난다. 고용보험도 마찬가지다. 고용보험을 수급 받기 위해서는 고용보험의 수급자격을 만족시켜야 한다. 고용보험의 수급자격은 일정기간 근속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저소득 근로자들은 일용직이고 하는 일도 힘이 든다. 오히려 동네에서 일거리가 있으면 가끔 가서 일할까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일하기는 어려운 계층이다.

 

정부는 사회보험제도를 빈곤대책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일할 수 있는 근로자들을 위한 제도이다. 일을 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보험료를 낼 수 있는 계층은 중산층이다. 저소득층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소득층에게 사회보험제도를 적용하는 것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의 능력개발을 돕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저소득층을 위해서라면 사회보험 자체에 정부예산을 쏟을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게 직접 예산을 쏟는 것이 낫다. 사회보험이 정부예산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저소득층이 낸 세금을 중산층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사회보험의 혜택은 중산층에 더 많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복지제도를 더 확대해서 저소득층에게 의료보호를 확대하고, 노인요양시설에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직업능력개발 훈련을 무료로 시키고, 자녀들 학비를 더 많이 보조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빈곤대책일 것이다.

 

 

3부   뜨끈뜨끈 한국경제를 달군 현안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든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일자리는 정부가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기업의 투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특정부문에 재정지출을 증가시키면 그 부문에서 일자리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 눈에는 일자리가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에 의해 일자리가 증가한 것은 보이지 않는 다른 부문에서의 일자리가 감소한 결과이다. 그 돈을 납세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이지 않고 납세자의 손에 남아 있게 한다면 납세자들은 식품, 의류, 자동차, 책, 컴퓨터, TV 등에 보다 많이 지출했을 것이다. 그러면 각 부문이 자극을 받아 일자리가 늘어났을 터이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정부의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은 사회 전체의 일자리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이다. 납세자에게 거두어들인 돈이 정부프로그램에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프로그램을 관리, 운영하는 데도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지금 경기가 침체에 빠져 실업이 증가한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정책을 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정부 정책은 그 반대방향이었다. 또한 정책의 비일관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지금 경기를 활성화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처방은 뉴딜 정책이 아니다. 민간활동이 증가하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선 취해야 할 조치는 규제완화다. 현재 경제관련 각종 규제가 7,400종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기업과 외국기업의 투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기업활동을 막는 요소다. 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불법적인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법과 원칙을 지켜 그러한 활동이 만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여입학제는 도저히 안 되는 걸까?

찬반의견을 들여다보면 기여입학제를 둘러싼 논의는 실용명분 간의 갈등현상으로 인식된다. 한국의 전통적 가치 판단은 일반적으로 실용보다는 명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사회 운용의 질서 측면에서 중요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되는 명분도 있다. 그러나 기여입학제의 경우 사회구성원간에 위화감이 조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 반대논리의 핵심이지만, 이는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적 측면 외에 별다른 실질적 폐해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의 능력에는 인적 측면과 물적 측면의 능력이 모두 포함된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사안은 아니다. 더구나 현재도 개인의 지적 능력과 경제적 능력이 모두 대학 진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기여입학제는 이를 부분적으로 명시화하는 것일 뿐, 경제적 지위에 따른 새로운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기여입학제를 허용할 경우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을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찬성하는 측의 논리대로 대학재정이 확충됨은 물론 효과적 관리를 통해 대학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수 도 있다. 반대로 사회적 갈등을 증폭하고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제도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재정 상황이 기존의 방법으로는 개선될 전망이 밝지 않고, 정서적 측면 외에 다른 사람의 교육기회를 박탈하는 등의 폐해를 유발하지도 않으므로, 기여입학제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적 능력 차이는 인정할 수 있지만 물적 차이만은 인정할 수 없다는 평등 가치만을 고집하면서 한사코 반대할 일만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기여입학제의 채택 여부와 방법 등은 각 대학의 자율에 맡기고 제도의 정착과정을 지켜보며 다듬어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은행은 언제나 마음씨 좋은 공공기관?

최근 고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논의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에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금융기관, 특히 은행이었다.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을 공공기관처럼 아니 정부 산하기관처럼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는 많이 변했다. 은행의 공공기관화는 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아직도 은행경영을 좌지우지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은행에 대한 국민의 태도 역시 정부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은행들은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인 예대마진을 확대함으로써 수익을 증대시켰으며, 이것은 2004년도 은행권의 최대수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언론이나 국민들은 이에 대해 크게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은행들이 국민의 어려운 생활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은행은 기업이다. 다만 생산에 투입되는 것 중 중요한 것이 돈이고 주요 생산물이 돈이라는 것이 다른 기업과 다를 뿐이다. 기업의 특성은 경쟁 속에서 이윤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저금리시대에 높은 예대마진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은행에 대해서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우리가 비난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다. 정부가 은행들이 경쟁하지 않고 높은 예대마진을 누릴 수 있도록 은행산업에 높은 진입장벽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또 은행소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 때문에 자본가가 쉽게 은행을 설립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비경쟁적인 환경에서 우리나라 은행들은 허약한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예대마진이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취약한 수익구조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우리나라 은행들이 선진 외국은행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정부는 은행들의 자율적인 경영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오히려 은행산업의 진입장벽과 은행소유 제한을 완화하여 은행들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이 일자리를 늘리나?

외환위기 이후 대량실업과 근로조건의 악화, 불평등 구조의 심화 등 노동시장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일자리 나누기의 일환으로 근로시간 단축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근로시간 단축의 가장 본질적인 지향점은 근로자의 건강, 고용불안, 산업재해 등 근로능력을 보호함과 동시에 근로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면서 어떻게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배경에는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단순히 근로시간의 단축 외에도 많은 요소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현실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은 가장 기본적으로 기업의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법정근로시간을 단축하고도 초과노동시간이 증가하여 실제 근로시간이 단축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초과근로시간에 대한 비용이 추가적 고용에 따른 비용보다 낮으면 기업은 새로운 근로자를 고용하기보다 연장근로를 통하여 생산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일자리 창출 여부는 근로시간 단축에 상응하는 노동생산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만약 임금수준을 삭감하지 않으면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킨다면 기업과 근로자는 경제적 지대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또한 초과근로보다는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요컨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가 늘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이 최소한 현재의 수준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노동비용도 초과근로에 의한 것보다 추가고용에 의해 소요되는 노동비용이 낮아야한다. 이러한 기본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반드시 일자리를 늘린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근로시간 단축에 의한 고용효과를 노리기 위해서는 기업과 노동조합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교대제, 교육휴가제, 안식년제 등의 활용을 통하여 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인적자본투자 효과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작업조직의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노동 강도가 오히려 강화되는 작업조직이 구축되면 비록 단기적으로는 노동생산성이 일정 수준 유지될지 모르지만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고용확대 효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청년실업에는 대졸자만 있나

2004년 연간 청년실업률은 7.9%, 실업자 수 39만 명으로, 구직준비중이라는 계층까지 포함할 경우 청년 취업애로 계층은 70만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실업률 대비 청년실업률은 2.7배로 OECD 평균 1.9배에 비해 높게 나타나 큰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졸자들은 본인이 원하는 직업에 취업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다소 길다는 것일 뿐, 취업을 하고는 있다. 반면 고졸 이하 청년들은 2004년에도 청년실업의 63%, 24만 명이 실업상태에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달리 고졸 이하 청년실업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말한다. 학력이 낮은 취업애로 계층은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취업이 어렵다. 고졸 이하 청년들의 실업률은 통계에서 보다시피, IMF금융위기 때부터 최근 경기불황 상황에 이르기까지 대졸 청년실업률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즉, 경기에 더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이들 계층이야말로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정부의 공적인 정책대상이 되어야 하나 현실적으로는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본인이 원하는 직장에 취업이 안 될 경우에 30인 미만 중소기업 생산직에라도 취업하겠다는 응답자가 고졸 이하에서는 40%가 넘는다. 부천지역 중소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애로요인 중 가장 큰 것으로 인력부족을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정밀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기능직 부족이 15%이다. 부천지역은 제조업이 주류이며 특히 자동차부품, 기계, 광학 등 성장업종 중소기업이 90%를 넘고 있다. 성장산업에서의 중소기업 인력부족을 청년층 실업해소와 연결하여 해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고용안정인프라 구축에 대한 투자다. 이를 통해 구직상담을 해오는 청년층에게 중소기업 지역, 업종별 직업훈련을 받게 하면 청년실업의 단기 해소가 가능할 것이다. OECD 선진국들의 청년층 실업대책도 학교 중도탈락자 및 장기실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제 고졸 이하 청년실업에 대한 사회의 주목과 정책제시가 중요하다.

 

작은 정부가 필요하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국민 부담의 과중문제에 대해 깊이 고심하지 않고 큰 정부를 거느리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정부의 규모와 기능의 지나친 확대는 권력의 비대화와 그에 반비례하는 국민의 기본권 위축을 가져온다. 동시에 큰 정부의 운영에는 돈이 많이 들고, 정부가 그렇게 사용한 돈은 모두 세금이라는 국민부담으로 되돌아온다.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업무를 여러 중앙부처에서 중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비효율적이고 상호 충돌하는 잘못된 구조마저 고치려하지 않는다. 이는 행정의 능률을 떨어뜨리면서 세금으로 거둔 재원을 낭비하게 된다. 이런 정부를 큰 정부, 돈 많이 사용하는 정부 또는 값비싼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폐단들을 없애는 정부의 몸집 줄이기이다.

 

작은 정부는 그 몸집의 작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부담인 재정재원을 사용함에 있어서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는 정부여야만 진실한 의미의 작은 정부이다. 사회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기능만을 정부에 맡겨서 정부의 몸집을 작게 한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돈 쓰임새가 낭비적이면 값싼 정부의 목표는 실현될 수 없다. 작은 정부를 실현하려면 민간부문에 맡기기 어려운 기능만을 정부가 수행하고, 시장경제의 원리가 작동할 수 있는 사업들 중 정부가 맡고 있는 것은 과감하게 민간부문으로 넘겨야 한다. 아울러 몸집이 줄어든 정부에 대해서는 국민이 정부의 돈 쓰임새를 통제 감시할 수 있도록 예산제도를 개혁하여 낭비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정부가 실현되면 국민의 세금 부담도 점차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