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빚
Part 1 태초에 빚이 있었다
100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위기
어제는 친구인 민환의 상가에 다녀왔다. 민환의 부모는 자살했는데, 부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주식이었다. 노부부는 결혼할 예정인 아들에게 집을 얻어주고 싶었고, 그래서 민환의 아버지는 “지금 가진 돈으로는 전셋집도 시원치 않다”며 아내를 설득했고, 민환의 어머니도 남편을 믿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소소하게나마 주식투자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금을 깨고 1억 원을, 또 집을 담보로 1억 원을 대출 받아 남편에게 맡겼다. 그렇게 투자한 2억 원이 한 달만에 3억 원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석 달 후엔 평가금액이 2억 원에도 못 미쳤다.
다시 1억 원을 대출 받아 물타기를 시도했다. 주가는 그래도 계속 하락했고, 원금이 3분의 1 토막 되어, 당장 주식을 팔아 빚을 갚으려 해도 1억 원이 모자랐다. 게다가 대출이자는 다락같이 올랐다. 한편 부부를 자살로 내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사채였다. 정말 주식시장이 바닥이라고 믿은 남편이 아내 몰래 사채까지 끌어다 투자한 것이다. 사채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원금 5천만 원이 반년도 안 되어 1억 원이 되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집으로 들이닥친 후, 노부부는 심하게 다퉜고, 남편은 차를 몰고 나가 그대로 절벽으로 돌진했다. 아내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만을 남긴 채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친구들은 소설 같다고 했지만, 철수에게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철수도 아내 영희 몰래 2천만 원을 마이너스대출 받아 주식투자에 썼기 때문이다. 신용거래까지 써서 투자금을 3천만 원으로 불렸는데, 지금 평가금액은 1천600만 원 남짓이다.
빚 권하는 사회, 짙어지는 그늘
“김 과장님!” 마케팅부로 2달 전 옮겨온 장태경 대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저기서부터 불렀어요. 민망하게 모른 척하시는 줄 알았어요.” 넉살 좋은 친구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어느덧 회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먼저 타고 있던 최 부장이 장태경을 보고 웃음 지었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장태경이 먼저 인사했다. 철수도 목례를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철수는 컴퓨터를 켜고 HTS부터 접속했다. 아직 장 시작 전인데도 예상 체결가는 10% 가까이 밀리고 있었다. 잠시 후 회의가 있었고, 회의가 끝난 후 철수는 자리에 돌아가자마자 HTS를 확인했다. 큰산중공업은 연일 하락세다. 올해에만 3분의 1 토막이 났다. 물타기를 해도 역부족이었다.
당장 다음 달 카드대금이 걱정이다. 집 사느라 빌린 대출이자를 갚고 나면, 월급을 받아봐야 남는 게 없다. 철수는 지난해 7월에 5억 원짜리 집을 샀다. 그중 2억3천만 원은 대출이었다. 집값은 6개월만에 6천만 원이나 올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철수는 막차를 탄 건 아닌지 두려웠다. 점심시간, 철수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은행으로 달려가, 중국펀드를 환매하겠다고 말했더니 직원은 “지금 수익률이 -50%입니다. 환매해 손실을 확정하느니, 조금 더 보유하시면서 반등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라고 권했다. 지난 번 30%쯤 빠졌을 때 환매하는 게 어떻겠냐고 은행에서 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철수는 금방이라도 회복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펀드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그 돈을 펀드에 더 투자했다. 물타기를 한 거다. 하지만 이후에도 중국 증시는 계속 하락했다. 그때 은행 직원의 말을 들을 걸 싶었다. “돈이 좀 필요해서요….” “그러면 펀드담보대출을 받으시는 건 어떨까요? 대출을 받으시고 수익률이 좀 회복되면 그때 환매하시는 게….” 설명을 듣고 보니 그랬다. 철수는 일단 200만 원을 대출 받아 이번 달 카드대금을 막기로 했다.
빚을 지는 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
식후 담배가 당겨서 휴게실을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아침에 판다고 했잖아. 친구라는 게…. 뭐?”라는 허세민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들어갔다. 허세민은 철수를 보고선 당황해 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뭐 좀 일이 꼬여서요.” “주식이지? 나도 그래. 벌써 1천400만 원이나 날렸다.” “김 과장님, 아니 형. 나 알잖아. 나 대학교 때도 주식투자로 용돈벌이는 했어. 그런데… 아 진짜. 최악이다. 시장이 박살나니까 한국중공업도 5만 원 선이 깨지더라고. 그게 어디 그럴 회사야? 그래서 급하게 2천만 원 마이너스대출 땡겨서 풀미수 질렀지. 사고나니까 낙폭이 줄더라고. 잘했다 싶었지. 그런데 어제 오후에 나갔다오니까 종가가 하한가야. 미수까지 질렀는데….”
“세민아, 너 돈 입금 안 하면 내일 반대매매 들어오는 거 알지? 일단 오늘 정리해. 내일 또 떨어지면 깡통이야.” “형,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끝장을 볼 거야. 한국중공업은 내가 계속 보던 애야. 지금 주가는 너무 싸. 대출 더 받아서 미수금 갚고 물타기까지 할 거야.” “세민아, 그래도….” “형, 형한테 이야기하니까 속은 후련하다. 내가 잘 되면 꼭 한턱낼게.” 허세민을 보면 거울을 보는 기분이다. 불연히 장례식장에서 민환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빚을 져서 투자하는 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짓이야.”
Part 2 잔치는 끝났다
주식,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
“허 대리는 아직 안 나왔나?” 최 부장 목소리가 급하다. 장태경이 허세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몇 차례 했지만 신호만 갈 뿐이다. 한 시간 후쯤 지나서야 허세민에게 전화가 왔다. 아파서 못 나온다고 했다. 다음날 허세민은 제때 출근했지만, 얼굴은 하루 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철수는 자판기에서 커피 2잔을 뽑았다. 옥상에 가보니 예상대로 허세민이 있었다. 철수가 인기척을 내자, 그제야 돌아봤다. “세민아, 요즘 널 보면 거울을 보는 것 같다. 너무 처지지 마라. 나까지 지친다.” 허세민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형, 인생이 그런가봐. 쉽게 되는 게 없다. 돈이라는 거, 손에 잡힐 듯하면서 안 잡히네. 형, 나는 내가 주식투자를 잘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닌가봐.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봐.” 하늘이 뿌옇다. 철수의 마음도 그랬다. 다 정리해서인지 허세민에게서는 초연한 구석마저 느껴졌다. 철수는 차라리 그런 허세민이 부러웠다. 철수는 그래도 결단을 못 내렸다.
펀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딩동.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철수가 문자를 확인했다. ‘펀드 담보 부족, 추가 입금 바랍니다.’ 철수는 통화하기 위해 화장실로 갔다. “고객님, 펀드평가금액이 줄어 담보 비율이 부족합니다. 추가로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강제 환매됩니다.” “그래서 얼마나 더 넣어야 하나요?” “최소 112만 원은 더 넣으셔야 합니다. 평가금액이 더 줄어들면 입금해야 할 금액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더는 안 떨어질 거라 믿고 빚까지 내서 왜 펀드 물타기를 했을까?’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Part 3 사방이 빚의 지뢰밭
신용카드는 빚 카드
이번 달 카드대금이 300만 원에 육박한다. 카드 돌려막기로 불어난 돈은 지난달 펀드담보대출을 받아 갚았는데 이상했다. 철수는 카드고지서를 보며 지난 한 달을 복기했다. ‘현금서비스 123만8천 원.’ ‘아차’ 싶다. 펀드의 담보가 부족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급한 마음에 현금서비스를 받았었다. 현금서비스는 편리하지만, 문제는 갚을 때다. 선이자 1.5%에 대출이자가 연 20%로 사채이자를 떼이는 기분이다. ‘안마의자 43만 원, 할부 2회차.’ 잊고 있었다. 철수는 두 달 전 아버지께 생일 선물로 129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사드렸다. 카드고지서를 뚫어지게 쳐다봐야 답은 안 나온다. 그러다 이메일 고지서 맨 밑에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카드대금이 걱정이라면? 지금 리볼빙을 신청하세요!’ 리볼빙,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3년 전 고교 동창 모임에서 들은 이후로는 처음이다.
그때 친구는 “너 리볼빙으로 100만 원을 다 갚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아냐? 네가 리볼빙 최소결제로 매달 카드대금의 5%씩만 갚는다고 치자. 그럼 30년이 걸려. 쉽게 말해 넌 연 20% 이자를 내고 100만 원을 30년 동안 갚기로 하고 빌렸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너 다음 달에는 카드를 안 쓰냐? 또 쓰지? 그 늘어난 원금에 또 이자가 붙으니까 갚아야 될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게 리볼빙이야. 그러니까 절대 쓰지 마라.” 100만 원 갚는데 30년이 걸린다는 말을 들은 이후 철수의 머릿속에서 ‘리볼빙’은 삭제된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리볼빙을 신청하기로 했다.
‘신용으로 주식투자하기’의 함정
한 달 전 시장이 반등하자 “바닥은 확인했다”와 “추가 하락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철수는 전자에 희망을 걸었는데, 낙관론 쪽으로 기울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철수가 가진 주식의 3분의 1은 신용매수이기 때문이다. 주가가 더 떨어지겠나 싶어 신용을 써서 물타기를 했던 것이다. 철수가 산 신용 주식의 만기일은 이제 3주 남았다. 원금 2천만 원에 1천만 원은 신용을 썼다. 이렇게 총 3천만 원을 투자하고 물타기를 했는데도 현재 수익률은 -40%다. 지금 팔면 1천800만 원밖에 안 남는다. 그때 신용을 쓰는 게 아니었다. 신용을 쓰지 않았다면 더 버틸 수 있었다. 분명 지금은 너무 싸다. 어제 읽은 기사를 보니 큰산중공업이 현재 보유한 현금만 해도 지금의 시가총액보다 많다고 한다. 그런데도 외국인들이 죄다 내다파니 주가가 못 견뎠다.
마이너스통장도 빚이다
“딩동,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철수는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린 것을 느끼자 핸드폰을 챙겨들고 화장실로 갔다. ‘펀드담보 부족, 익일 4시까지 250만 원 추가 입금 요망.’ 점심시간에 은행에 갔다. “대출이 안 된다고요? 30대 그룹 과장이 대출이 안 되면 도대체 누가 대출을 받을 수 있나요?” “그게…, 지금 마이너스통장을 쓰시잖아요. 한마디로 이미 대출이 나간 거죠. 또 현금서비스도 받으셨네요. 죄송합니다.” 철수는 더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지만, 잠시 직원 앞에 앉아 있었다.
대한민국은 빚 공화국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이렇게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철수는 옆에 놓인 종이를 뒤집어 써내려갔다. ‘주택담보대출 - 이자 9%’, ‘마이너스 통장 - 이자 10%’, ‘현금서비스 - 이자 20%’, ‘카드 리볼빙 - 이자 21%’. 써놓고 보니 빚의 노예가 된 기분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미 펀드는 담보가 부족한 만큼 강제 환매되었다. 신용으로 산 주식의 만기일은 3주도 안 남았다. 지금 팔아봐야 800만 원도 안 남는다.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없다. 전화가 울렸다. 영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수 씨, 나 힘들어. 지금 병원 가는 길인데, 몽구(태아의 태명)가 나올 것 같아. 빨리 와.”
Part 4 시작이 반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김 과장, 잠깐 이야기 좀 하세.” 최 부장이 불렀다. “궁금하지? 내가 왜 자넬 불렀는지.” “네, 사실 그렇습니다.” “요즘 자네를 보니 내 옛날 모습이 떠올라서 그래. 힘든 일이 있지? 그것도 돈 때문에.” 놀랐다. 철수는 ‘잡아떼 봐야 소용없겠지?’라는 생각에 사실대로 털어놨다. “10년 전 딱 나군.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네. 7시에 요 앞 이자카야에서 보자고. 아차차, 이걸 까먹었군. 숙제가 있네. 지금까지 나한테 한 얘기를 정리해오게. 지금 자산은 얼마나 있고, 빚은 얼마나 되는지, 현재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고 있는지도 말일세.” 철수는 최 부장이 내준 숙제를 시작했다. 일단 가운데에 줄을 긋고 좌우에 ‘자산’과 ‘부채’라고 쓰고, 그 아래엔 다시 선을 그어 ‘수입’과 ‘지출’이라고 썼다. 다 써놓고 보니, 최종적으로 자산은 6억1천750만 원, 부채는 3억4천750만 원이었고, 월수입은 380만 원, 월지출은 435만 원이었다. 한심했다. ‘여태 내 처지도 모르고 뭘 했나’ 싶었다.
당신도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자카야에 들어서는데 장태경이 눈에 띄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장태경과는 반대쪽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런데 장태경이 먼저 철수를 불렀다. “과장님, 여기요.” “어, 장 대리가 여기 웬일이야?” 장태경이 말하려는 순간 최 부장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두 사람 다 와 있었네. 내가 좀 늦었나?” 최 부장이 알은체하며 장태경 옆에 앉았다. “부장님, 소개해주신다는 분은….” “김 과장, 소개하겠네. 장태경 대리, 사실 내 조카야. 누나 아들이지. 괜히 오해라도 살까봐 사무실에서는 말 안 했네. 놀랬다면 미안하네.” 최 부장은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술이 나오자 최 부장이 철수와 장태경에게 술을 권했다. “장 대리가 와 있어서 놀랬을 거야. 이제부터 그 이유를 말해주겠네. 좀 길어.”
그러고선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과장, 자네도 알 걸세. IMF 외환위기 때문에 다들 죽을 맛이었지. 정말 못 견디고 죽는 사람도 있었어. 그러니까 태경이 아버지, 매형도 그때 자살했어. 매형의 죽음은 누나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심약한 누나에겐 종교가 최선의 위안이었지. 그래서 밥하고 청소하면서 절에 머물겠다고 하면서 매형 보험금이라고 1억 원을 나한테 줬어. 태경이를 부탁한다고. 나도 암담했어. 내 식솔도 챙기기 힘든데 태경이까지 맡아 잘 키울 자신이 없었지. 그런데도 내가 태경이를 맡은 이유가 뭔 줄 아나? 하나밖에 없는 누나 혈육이라서? 허허. 사실 그 1억 원이 탐났어. 나도 그때 아파트 사고 주식투자하느라 진 빚이 상당했지. 그래서 1억 원으로 급한 빚을 정리했지.”
“외삼촌이 말만 그렇게 하세요. 저 같으면 돈만 챙기고 조카는 나 몰라라 했을 거예요.” “아무튼 매형 목숨 값으로 내 빚잔치를 하고 나니 비참하더군. 빚 때문에 인생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빚이라면 진저리가 처지더군. 앞으로 빚이라는 놈은 상종도 않겠다고 다짐했지. 그때 신용카드도 다 잘라버렸어.”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여간 그 많은 빚을 어떻게 갚나 싶었는데, 결국 되더군. 진심으로 빚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마음먹으니까 되더라고. 내 얘긴 여기까지네. 자, 자네한테 진짜 도움되는 이야기는 태경이가 해줄 걸세.”
쉬운 것부터 당장 시작하라
장태경이 말을 시작했다. “제가 누굴 가르칠 만한 그릇은 못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저 ‘어린놈이 이렇게 살았구나’ 하고 편하게 들어주세요. 그저 모든 게 끝났으면 싶었어요. 그래서 외삼촌 집에 와서는 방에 틀어박혀 꼼짝을 안 했어요. 그렇게 멍하니 한 달을 보낸 후엔 저도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제 머리로는 감당이 안 돼 책을 읽었죠. 처음엔 주로 자살과 관련된 책만 보다가 소설, 철학, 역사 등 닥치는 대로 읽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라고요.” 태경이가 말을 이었다. “그 다음엔 ‘아버지가 왜 자살까지 해야 했나’ 싶더라고요. 재테크가 얼마나 어렵기에 그랬나 싶었죠. 그래서 주식ㆍ부동산ㆍ투자학ㆍ재무설계 등 재테크와 관련된 책을 깡그리 읽었죠. 그렇게 해서 제가 내린 결론이 뭔지 아세요? ‘빚을 지지 말자’예요. 시시하죠? 그거 아세요? 진리는 단순하고 평범하다는 거. 그렇지만 위대하죠. 과장님, 실례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지금 괴로우시죠? 왜죠? 빚 때문이죠? 게다가 내가 이깟 돈 때문에 이러나 싶어 자학한 게 한두 번이 아닐 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빚을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빚은 사람을 당장 못 먹고 못 입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에 더해 영혼을 좀먹죠. 빚이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니까 세상을 버텨낼 의지가 약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제 아버지처럼 자살을 택하기도 하죠.”
장태경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일어났다. 최 부장까지 휴대폰을 들고 일어서자 철수만 남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 “과장님, 답을 드렸으니 이젠 어떻게 그 답을 찾느냐가 남았죠? 원래 이건 알아서 해야 하는데…. 제가 과장님이니까 특별히 단기속성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빚을 지지 않으려면, 버는 돈보다 적게 쓰면 되잖아요. 간단하죠? 그러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많이 벌거나, 씀씀이를 줄이거나. 저의 경우 그땐 학생이니 많이 벌기는 애당초 글렀고, 남은 방법은 씀씀이를 줄이는 거였죠. 그래서 만든 게 이거예요. 장태경은 수첩을 내밀었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장태경의 절약행동수칙 : ① 가랑비에 옷 젖는다. ② 갖고 싶은 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③ 내일 벌 돈을 오늘 쓰지 말라. ④ 생각하고, 기록하고, 점검하라.
Part 5 일단 무조건 아껴라
가랑비에 옷 젖는다
셋은 밖으로 나왔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철수는 아쉬웠다. “장 대리, 한잔 더 하고 싶은데 괜찮겠어?” “저야 좋죠.” 최 부장이 먼저 가고 철수와 장태경은 조용한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럼 이제부터 그 행동수칙을 하나씩 설명해 드릴게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 간단히 말해 사소한 지출을 아끼라는 거예요. 과장님, 담배 하루에 몇 갑이나 피우세요?” “보통 때는 반 갑 정도?” “그럼 그 돈을 1년 모으면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단순하게 계산하면 하루에 반 갑이니까 한 달에 3만7천500원, 1년이면 45만5천 원이네요. 꽤 되죠? 그런데 정말 이것밖에 안 될까요? 복리라고 들어보셨죠? 이틀에 담배 한 갑 살 돈을 매일 적금에 붓는다고 가정하면, 금리가 연 7%일 때 이 돈을 1년 동안 모으면 약 46만 6천 원이 돼요. 똑같은 방식으로 10년 동안이면 643만 8천 원이 나오죠. 푼돈이라고 무시할 게 못 돼요.” 장태경은 그래서 택시도 가급적 안 타고, 외식도 잘 안 한다고 말했다. 다음 주 화요일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하고 그날은 거기서 헤어졌다.
갖고 싶은 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화요일이 되었다. 7시 10분 전에 도착한 가게는 여전히 썰렁했다. 잠시 후 장태경이 들어와 앉았다. 철수가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자, 오늘은 두 번째 수칙부터 시작할까요? 과장님, 사실 우리가 사고 싶은 거, 그게 꼭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남들이 다 사니까, 가끔 그게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괜히 있으면 써먹을 데가 많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 중 대부분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제 나름의 원칙을 세웠어요. 뭔가를 사고 싶을 때에는 ‘5ㆍ5ㆍ5 법칙’을 따르는 걸로요.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이 왜 필요한지 이유 다섯 가지를 생각하고 빈 종이에 적어보는 거예요. 그래도 다섯 가지 이유가 있는 물건을 살라치면 최소 다섯 군데를 돌아다녀요. 또 그렇게 비교를 해서 싼 걸 골랐다고 해도 그날은 사지 않아요. 5일은 기다리죠. 그렇게 기다리는 사이에 그냥 마음이 바뀌는 경우도 있거든요.” 듣고 보니 5ㆍ5ㆍ5 법칙을 지키면 정말 필요한 것만 사게 될 것 같았다.
내일 벌 돈을 오늘 쓰지 말라
분위기 전환 겸 이번엔 철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 벌 돈을 오늘 쓰지 말라’는 건 뭐야?” “과장님,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요즘은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어요. 현대판 화수분, 과장님 지갑에도 있어요.” 철수는 지갑을 열어봤다. 금방 답이 나왔다. 신용카드다. “과장님, 아까 제가 5ㆍ5ㆍ5 법칙을 설명 드렸을 때 속으론 ‘참 살기 피곤하다’고 생각하셨죠? 흐흐. 제가 무슨 성인군자입니까? 저도 사람인데, 이걸 어떻게 늘 지킬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제가 찾은 방법이 뭔 줄 아세요?” “글쎄?” “바로 체크카드를 쓰는 거예요. 체크카드는 통장잔고, 즉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의 한도 내에서만 쓸 수 있잖아요. 신용카드는 편리하기는 한데, 내일 들어올 돈을 오늘 쓰게 만들어요.”
생각하고, 기록하고, 점검하라
지금껏 장태경이 말한 원칙이라는 건 평범하고 단순했다. 철수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키기 힘들다는 것, 그게 문제였다. 잠시 후 장태경은 이제 마지막이라며 수첩에서 ‘생각하고, 기록하고, 점검하라’라고 적혀 있는 부분을 펼쳤다. “이거 무슨 주문 같죠? 맞아요. 원칙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실천론이랄까, 그런 거예요.” 장태경이 수첩을 한 장 넘겼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7일-지출 전선 적신호, 생각 좀 하고 살아!’, ‘28일-알바비 들어오는 날, 은행가는 길에 있는 전자대리점을 조심하라!’, ‘7일-부지런히 서두른 덕분에 1만5천 원 절약, 역시 태경이닷!’
“과장님도 보니까 금방 아시겠죠? 그날의 지출을 반성하는 거예요. 얼마를 썼는지 적어보고 과연 잘한 건지 체크하는 거죠. 이렇게 적다 보면, 쓴 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소비를 기록한다는 것, 이거 진짜 중요해요. 또 점검은 쓴 걸 생각해보는 거예요. 돈이 어떤 구멍으로 빠져나가는지, 그 구멍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을 하면 내일은 어떻게, 다음 달은 또 어떻게 쓰면서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이 나오죠.” 장태경은 수첩을 덮고, 명함을 내밀면서 말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비법이랍시고 떠들어서 조금 실망하셨죠? 구체적인 계획, 그러니까 거창하게 말해 재무설계 같은 거는 아무래도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겠죠? 언제 시간 나실 때 이 분을 찾아가보세요. 제가 과장님 소개는 드려놨어요.” 명함에는 ‘재무설계 전문가 김도움’이라고 적혀 있었다.
Part 6 적자인생 탈출, 4단계 프로젝트
정말로 빚에서 벗어나고 싶어야 한다
철수는 김도움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김 과장님, 먼저 저와 장태경 씨와의 관계부터 먼저 설명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태경이 아버님께서 투자 실패로 자살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제가 그때 태경이 아버님의 계좌를 맡았던 ‘죽일 놈의’ 증권사 직원입니다. 태경이 아버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입사한 지 갓 1년이 지난 무렵이었고, 그때는 정말 거침없었죠. 찍어준 종목의 수익률이 꽤 높아 고객들이 다른 고객을 소개해주기도 했습니다. 태경이 아버님도 그렇게 만난 거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시장이 그런 게 아니더군요. 확실하다고 믿은 종목의 주가가 반토막이 났죠. 견디다 못해 수면제까지 먹었습니다. 하루는 약을 너무 많이 먹어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병원이더군요. 정신 좀 차리고 집에 와서 삐삐를 확인해보니, 태경이의 아버님이 보낸 음성 메시지가 있더라고요. ‘김 대리, 고마웠어…. 이것만 명심하게. 자네 잘못이 아니야. 자네 잘못이 아니야….’ 처음엔 그 메시지의 의미를 몰랐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 날이 태경이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이었습니다. 그 뒤 정말 ‘죽어버릴까’ 하고 마음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태경이 아버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내가 죽어버리면, 장 부장님(태경이 아버님)의 뜻을 어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살자, 살아야 한다’ 이러면서 버텼죠.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태경이를 몇 번이나 찾아갔어요. 물론 태경이가 저를 만나줄 리 없었죠. 만나지는 못해도 태경이를 계속 지켜봤어요. 그리고 장 부장님 같은 사람들이 더는 없도록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당시에는 개념도 생소한 재무설계를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인생에서 중요한 건 투자가 아니더군요. 사람이 돈에 휘둘리지 않고 살게 해주는 재무설계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중에서도 빚 관리가 핵심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증권사에 들어갔어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회사 생활과는 관계없이 태경이를 거의 매일 보러 갔어요. 처음에는 태경이도 길길이 날뛰었는데, 매일 그러니까 제가 불쌍하다 싶었나 봐요. 좀 지나니까 말은 받아주더군요. 그러면서 그야말로 대화란 것도 하게 되고, 지금은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마치 형제처럼요. 숙제가 있습니다. 김 과장님의 자산상태표와 현금흐름표를 다음 만날 때까지 만들어오세요.”
1단계 - 자산상태표를 만들어라
일전에 만들어 놓은 자산상태표와 현금흐름표를 가지고 김도움을 다시 만났다. 그는 두 장의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1분이나 지났을까. “숙제를 잘 해오셨네요. 잘 하긴 했는데 조금만 손을 보면 더 좋겠네요. 여기 아파트가 5억6천만 원 하는 게 맞나요?” “반년 전쯤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은 얼마나 되나요?” “얼마 전에 저희 거랑 비슷한 게 5억 원에 팔렸다고 하더군요.” “그럼 5억 원으로 적으셔야 합니다. 자산은 현재 가치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격은 되도록 보수적으로 잡으시고요. 주식과 펀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기에 주식과 펀드의 현재 평가금액을 적어주세요.” 그렇게 하고 나니 자산이 7천950만 원 줄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자산상태표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부채를 점검하는 모양이다. “대출이 좀 많네요. 이자가 얼마죠? 또 대출 항목에는 언제가 갚아야 하는 모든 걸 적으셔야 합니다.” 고쳐 적을수록 자산은 줄어들고 빚은 늘어갔다.
2단계 - 현금흐름표를 만들어라
“현금흐름표는 자산상태표와 마찬가지로 자세히 적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어디서 돈이 새는지를 금방 찾을 수 있거든요.” 철수는 다른 종이에 다시 적기 시작했다. 보험은 가입한 상품별로 구분했고, 생활비도 세분화했다. “다 적으셨나요?” “다 적은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엔 뭔가 빠진 듯싶은데요. 이자는 하나도 안 쓰셨네요.” 그렇게 정리하고 보니 매달 나가는 돈이 36만 원 더 늘어 총 지출액이 489만 원이 되었다. 버는 돈보다 100만 원 가까이 더 쓰는 셈이다.
3단계 - 돈 새는 구멍을 찾아라
“잠시 쉬었다 하시죠.” 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잠시 후 다시 마주 앉았다. “세수하고 나니 개운한 느낌이죠? 재무설계도 그래요. 주기적으로 해주면 인생을 개운하게 만들죠.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일단 좋은 뉴스 하나와 나쁜 뉴스 하나가 있는데, 어느 쪽부터 들으실래요?” “나쁜 뉴스부터요.” “그럼, 그 전에 질문부터 하나 하죠. 아까 숙제 검사를 할 때 무슨 생각이 드셨나요?” “사실, 제 자산상태가 이 정도까지인 줄을 몰랐습니다.” “좋은 징조입니다. 벌써 스스로 문제를 느끼시고 계시잖아요. 김 과장님이 느끼신 그게 바로 나쁜 뉴스입니다. 지금 김 과장님의 자산상태가 심각하다는 겁니다. 현금흐름은 더 심각하고요.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좋은 뉴스도 알려드리죠. 적자인생 탈출 계획의 절반을 이미 끝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문제 해결의 첫 단추는 ‘너 자신을 알라’이기 때문이죠. 그럼 이제는 고치는 일만 남았죠.”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빚은 자산의 40%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보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조금 높다는 점입니다. 보험은 수입의 5% 정도가 적당합니다. 그것도 보장성 보험 위주로요. 세 번째 문제는 투자 부분입니다. 위험자산에 대한 비중이 지나치게 큽니다. 쉽게 말해 주식 관련 자산에 너무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문제는 노후 준비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상 4가지 문제의 큰 줄기를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줄기를 바꿔야겠죠? 사실 첫 번째 문제 빼고는 제가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미 해결책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결국 첫 번째로 말한 ‘어떻게 빚을 줄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자, 빚이라고 다 같은 빚이 아닙니다. 빚 중에도 질 나쁜 놈들이 있습니다. 이자가 높고, 대출기간이 짧은 애들이죠. 일단 김 과장님의 빚 중에서 현금서비스를 제일 먼저 갚아야 합니다. 카드 리볼빙도 질이 나빠요. 이 둘을 정리한 다음에는 아예 신용카드를 없애는 것도 방법입니다. 다음으로 주식과 편드에 관련된 빚입니다. 신용융자상환일이 2주 남았습니다. 시장이 반등할 때 빨리 정리하세요. 당분간 시장이 좋을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파트담보대출이 남습니다. 가장 규모가 크죠. 이것만 없다면 수입보다 지출이 큰 심각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집을 팔면 됩니다. ‘집을 팔다니,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셨죠? 맞습니다. 사실 아파트가격은 지금껏 계속 올랐습니다. 설사 가격이 떨어져도 ‘정 안되면 깔고 앉으면 되니까’라는 생각에 크게 걱정하지도 않죠. 그런데 문제는 빚으로 산 집이에요. 부동산은 가격이 최소한 대출이자만큼은 올라야 투자할 만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값이 오르기는커녕 떨어지고 있죠? 또 대출이자도 10%에 육박합니다. 이런 자산은 빨리 팔아치우는 게 좋습니다. 빚을 정리하는 게 궁극적으로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는 이야기죠.”
4단계 - 주기적으로 점검하라
“그리고 김 과장님, 세수를 매일 해야 깨끗한 얼굴을 유지하듯이, 자산상태나 현금흐름도 분기에 한 번, 못해도 1년에 한 번은 점검해야 합니다. 자, 이제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는 김 과장님의 몫입니다. 저는 도움을 주는 사람일뿐입니다. 제가 결정할 수는 없죠.”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온 철수는 영희를 식탁에 앉힌 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놨다. 주식이나 펀드로 진 빚이며, 지금은 카드대금 낼 돈도 없어 리볼빙으로 결제하고 있다는 것, 장태경과 최 부장과의 관계, 재무설계 전문가인 김도움과의 만남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영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철수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우리 아파트 팔자.” 영희의 눈에서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철수는 말없이 영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영희가 눈물을 그치고 철수를 쳐다봤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는 영희를 안았고, 영희는 철수에게 기댄 채 말했다. “철수 씨, 우리 몽구 이름을 용세로 하자. 김용세. 세상에 용감하게 맞서라고.” ‘용세’라는 말, 어감이 좋다. 철수는 문제가 있다 싶으면 늘 피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맞서야 한다. 철수는 ‘빚 권하는 세상’에 용감하게 맞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용세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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