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에게 -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20살이 채 되기도 전, 난 카메라 한 대를 울러 매고 어슬렁거리는 낭만의 삶을 택했어. 인생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지. 하지만 내가 카메라를 메고 둘러본 세상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더군.
1998년 나는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음을 알았지. 중국 연변지역에서 바라본 북한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반공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던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은 없었고, 황폐하고 적막한 침묵이 흐르는 곳이었던 것 같아. 난 연변에서 숨어 지내는 꽃제비 아이들이 벌린 손에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어. 내 어렸을 적 보았음직한 친구들이 먹지 못해 채 자라지 못한 손을 내밀며 나에게 하루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지.
친구야, 난 세상에 태어나 내가 그렇게 미안했던 적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때까지 난 북한이란 곳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지냈지. 무관심했단 말이야. 그러나 그 아이들을 보고는 이념이 달라 서로 싸우다 3.8선을 긋고 아직도 내가 옳다, 니가 그르다, 넌 나쁜놈, 난 좋은놈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난 서글프기 그지없어. 그냥 우리 아이들이고 우리 형제들인데 말이야.
난 그때 어떤 정의감 같은 것 때문이었는지 이 사실을 좀 더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중국을 찾아 숨어 지내는 탈북아이들을 만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어떤 죄책감에 싸여야 했지. 난 처음으로 사진 찍는 일을 택한 걸 후회했던 기억이나. 지금도 그때 만난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멍해지네.
내가 사실 이렇게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건 얼마 되지 않았지. 어느 날 TV에 나온 어떤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을 보고는 사실 많은 충격에 빠졌어. 아, 세상을 본다는 것은 저런 관점이 있는 거지…. 그 후 나는 광주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에 다니며 설거지도 하고 할머니들의 말동무도 해드리며 자주 그곳을 왕래했어.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돌아가신 박순덕 할머니께서 나에게 다시 카메라를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셨어.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 카메라로 어디를 봐야할지를 몰랐었거든. 할머니는 사진 찍는 놈이 와서 사진은 안 찍고 왜 엉뚱한 짓만 하냐며 내 카메라 앞에서 손수 포즈까지 취해 주셨지. 그때부터 난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선물 받았어. 그때가 1997~8년 때쯤이었고, 지금은 박두리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일제강점 당시 일본에 받은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는 거야. 900회를 넘은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도 그때 그 지식인은 참여했는지 궁금하네. 어느 신문사 기자라고만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취재 목적이 아닌 그저 할머니들과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매번 그곳을 찾던 것 같았는데….
친구야, 나는 그런 대한민국에 지금 살고 있어.
언젠가 성남의 비탈진 언덕을 카메라 한 대를 메고 어딘가 분주히 떠나던 나를 보고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지? 그 울음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재미없는 일들에 매여 종종거리고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서였나? 아니면 '세상을 바꾸고 싶다'던 나의 그 부질없음에 흘린 눈물이었나?
친구, 내가 그랬잖아. 이제 알겠다고.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나를 바꿔야 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나에 대한 끝없는 성찰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원동력임을 알았어.
사진을 찍으며 제일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라면 러시아의 황량한 벌판에서 채소 한웅큼씩을 내놓고 팔고 있던 고려인들을 취재할 때였던 거 같아. 백야의 시베리아. 덜컥거리던 소련재 트럭을 타고 옛 고려인들의 흔적을 찾아 뒤질 때, 10시간에서 20시간은 기차를 타야 다음 행선지에 도착하던 기억, 재래시장에서 만난 고려인들, 우즈베키스탄 김병화 농장에서 만난 고려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바이칼 호수… 모두 행복한 기억이네.
러시아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나에게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을 안겨주었어. 이제까지 사진기를 통해서 보던 세상은 일제식민지 시절의 뼈아픈 잔상과 6.25 전쟁이 남긴 분단의 아픔,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등이었어. 그것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었지. 하지만 고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으로 전통과 언어를 지키며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고된 현실을 이겨가면서 뜨거운 민족애를 가슴에 지니고 살고 있었어. 냉전시대에 남한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던 구소련의 여가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다 잡혀가는 일이 있은 후 우리말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는데 앞장서고 있대. 이렇게 우리는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었어. 그랬기 때문에 선조들은 우리에게 목숨 바쳐 독립된 나라를 물려주고 피 흘려 민주주의를 안겨줄 수 있었던 것 같아.
친구야, 난 세상을 살며 약간의 비열함도 배웠어.
어떡하면 힘 있는 자들에게 잘 보여 좀 편한 길을 갈 수 있는지도 알거 같고, 어떡하면 이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며 잘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도 어렴풋이 알거 같아. 어느 날 봉천동의 마지막 달동네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나도 그곳을 한번 찾은 일이 있어. 그 길엔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괴물 같은 포크레인에 밀려 황폐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난 그때 빨갛게 칠해진 벽면의 구호들을 등지고 나도 큰 포크레인에 밀릴 것 같은 공포감에 얼른 그곳을 떠났지. 그러면서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를 되 뇌이며 버스에 올랐어. 욕심, 집착… 그것에 대한 질문이었겠지?
성남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보면 세상의 단편들을 볼 수 있어. 난 모퉁이 한쪽 허름하게 자리 잡은 맥주집 단골이었지. 저쪽 신시가지 높고 잘빠진 건물 안에 있는 미끈한 어떤 술집보다 나는 그곳을 좋아했어. 거기선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의 땀과 푸념이 섞인 에세이들이 줄줄이 엮여지지. 큰 길에 하루가 멀다하고 생기는 성인용 온라인 게임방에 희미한 지푸라기 희망을 걸고 도박을 하던 사람들의 몰락. 치솟는 전세값에 둥지를 더 높은 지대로 틀수밖에 없던 신혼부부들. 싸움이 잦고 오토바이 굉음으로 한밤중 한번은 깨야하는 곳. 올라가다 올라가다 다시 외각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끝없이 쏟아내는 일등 신화들에 주눅 들려 죄지은 사람처럼 살아가. 그곳이 우리가 사는 동네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권력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내건 캐치플레이즈.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시키고자 절대 권력 거대공룡과 싸우고 있던 베네수엘라. 가난한 사람한테만 돈을 빌려주는 그라민 은행.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라민 은행의 원금 회수율.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면 절대 시작 할 수 없던 일이었을 거야. 이런 시스템들에 내가 관심을 가진 건 성남을 통해 본 우리사회의 극심한 양극화 때문이었어. 최고가 못 되더라도, 돈이 많지 않더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대우 받고 사랑받는 세상을 갈망했던 것 같아.
산청, 부모님이 사시는 지리산 자락에 앉아 있자니 바람이 꽤 좋군. 이곳도 60년 전 좌익과 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곳 중의 하나였어. 아버지가 젊었을 적 겪었던 6.25전쟁을 나는 자주 듣고 있어. 지금까지도 이 작은 마을에는 각 집마다 좌익과 우익의 명패들이 한국전쟁의 잔흔처럼 남아 있어. 비료를 준다고 도장을 찍으라더니 나중에 보도연맹으로 분류돼 영문도 모르고 학살당하는 게 전쟁이라는 것. 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해, 아직도 이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어떤 명확한 해결도 나고 있지 않아. 그런데 국민들은 월드컵에 미쳐 날뛰고 있을 때 미국에게 전시작전권 전환을 슬그머니 연기해주고 자기들끼리 박수치는 쇼를 봐야하는… 이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이 지구상의 하나뿐인 분단국가임을 잊고 살며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망각하는 죄를 짓고 있어. 이제 이런 일들은 정치가들의 구호로만 작용하고 있을 뿐 모두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무관심이란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지.
산청집에서 키우는 개가 강아지 네 마리를 낳았어. 너무도 귀여운 네 마리 강아지에게 나는 세.계.평.화.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런 거라네, 친구.
난 지금 그런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2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