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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도서요약/마케팅도서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도서요약)

by 홍승환 2008. 9. 11.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 세상을 보는 창을 열다

미국 최고의 사회·정치 기자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주요 사건과 21세기가 직면한 도전을 충실히 기록해왔다.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후 미국 민권운동의 태동기를 취재했으며, 《뉴욕타임스》의 베트남전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미국이 거쳐온 각 시대의 의미와 본질을 포착해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자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을 비롯해 『권력 당국(The Powers That Be)』, 『1950년대(The Fifties)』,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업계(The Reckoning)』 같은 저작들로도 이름이 높다.

 

내가 생각하는 창조적인 사람이란 관습적인 환경에서는 왠지 거북스러워하며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매일 9시부터 5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뭐든 스스로 파악해야 하며 제도와 획일성을 떠나 자신만의 질서를 갖춘 사람이다. 창조성이 있는 곳에는 고도의 개인주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본능을 믿어야 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주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육감이 있고, 여기에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져서 다른 사람들은 지니지 못한 재능으로 작용한다. 어떤 선택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선택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따져서 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 까닭은 다른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선택과 자유를 극대화하고 자신에게 남다른 소질이 있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소질을 잘 간직한 채 최대치를 끌어내야 한다. 돈이 창조성을 자극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창조성을 타고난 사람은 결국 창조적인 일을 하게 되는데, 다른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바람을 품은 사람은 그다지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 시절에 나는 하버드 크림슨 주필이었다. 나는 그 일에 능했고 상황 판단이 빨랐다. 내가 잘하는 거라곤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 처음으로 얻은 직업도 미시시피에 있는 작은 일간지의 기자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사회의 정치 역학이나 일상생활에 내 지식을 활용하면서 상대방의 심중을 읽고 인물을 간파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내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나는 저널리즘이 좋았고, 그 방면에 재능도 있었다. 그러나 금전이나 풍족한 생활을 위해서 그 길을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저널리즘에 투신하는 이유는 일단 그 일을 사랑하고, 자존심과 자의식이 그것을 원하며, 무엇보다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일은 감옥 같고,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다. 만약 대기업에 들어갔다면 나는 그다지 유능한 직원이 못 됐을 것 같다. 나는 지시를 받고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만이 내 유일한 티켓이라는 걸 알았고,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일은 창조적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자신이 탁월하다는 것을 아는 분야, 기회가 빈번하지 않은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아마 창조적인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창조성은 이른바 전부 아니면 전무일 때가 많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에 맹렬하게 달려드는데, 좋아하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감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실상 그 한 가지 일에서 멋지게 성공하느냐 아니면 나머지 전부에서 처절하게 패배하느냐, 양자택일의 상황인 것이다.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 무의식에서 아이디어를 얻다

에드워드 올비는 미국 연극의 지평을 바꿔놓은 작품과 주제 의식으로 유명하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동물원 이야기(The Zoo Story)>, <키 큰 세 여성(Three Tall Women)>과 <샌드박스(The Sandbox)>를 비롯한 이름 높은 희곡은 대부분 현대인의 삶을 깊이 통찰한 역작이다. 그의 작품에 담긴 독창성은 그를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분되는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올비는 퓰리처상을 세 차례나 받았고, 토니 평생공로상과 국가예술훈장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했다. 대학 강단에도 자주 서며 작가와 예술가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에드워드 F. 올비 재단의 회장이기도 하다.

 

나는 창조성이 우리 뇌 속 신경 회로의 어떤 장난스런 변덕에 따라 좌우된다고 확신한다. 지능이나 감수성,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심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살면서 똑같은 경험을 한다. 그런데도 창조하는 사람이 있고 창조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창조하는 사람은 단순히 경험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이때 창조적이지 않은 사람을 창조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창조력은 유행을 따르는 게 아니라 경험에서 스스로 자극을 받을 때 북돋울 수 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흡수하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능력은 스스로 간직해야지, 어딘가에서 가져와서 심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극작가가 되는 법 역시 가르쳐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희곡 쓰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있어도 극작가가 아닌 사람을 극작가로 만들 재간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극작가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 그 소질을 더 잘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나는 한 희곡에 대해 줄곧 생각해왔다는 걸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상당히 오랫동안 무의식에서 그것을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다 느닷없이 그 생각이 의식의 영역으로 전이된다. 무의식에서 진행되던 생각을 포착해서 의식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 내 창조 과정이다. 나에겐 이 방법이 효율적이고, 그걸 특별히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는다. 사고 과정은 상당 부분 직관적이다. 그 과정에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작품의 직관적인 전개는 대체로 무의식에서 일어난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극적인 효과를 높일 목적으로 미학과 주제를 통제하는 데는 고도의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무의식과 의식 양쪽이 서로 열띤 반응을 일으킨다. 나는 아이디어가 곪을 때까지 오래 나뒀다가 그 다음 종이에 옮긴다. 그러기까지 여섯 달이 걸리기도 하고, 2년이 걸리기도 한다. 다른 일을 하면서 그게 잘 진전되도록 놔둔다. 아이디어도 그러길 원하는 것 같다. 그 과정을 차단하거나 틀에 가두는 일은 없다. 처음 떠오른 아이디어에 스스로 다시 개입할 여지를 끊어버리기 때문에 도중에 뭔가 흥미로운 것이 떠올라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완벽하게 준비가 될 때까지 글을 쓰지 않는다. 물론 작업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중요한 건 이를테면 무의식에 머리를 달아줘서 말을 걸게 하는 것이다. 작업을 무의식에 일임해서 대신 진행하게 나둬라. 즉 무의식이 원하는 것에 제약을 가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고.

 

에리카 종(Erica Jong) - 내 안의 악마를 유혹하다

작가이자 교수인 에리카 종은 미국의 명성 높은 여자 단과대학인 바너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18세기 영국문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총 여덟 편의 소설을 썼고, 그 가운데 1973년에 발표한 『비행 공포증(Fear of Flying)』 등 몇 권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러 대학에서 문학과 작문을 가르쳐온 그녀의 작품은 세계 도처로 번역되어 미국과 서유럽뿐 아니라 동유럽,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98년에는 UN에서 선정하는 우수문학상을 수상했다.

 

내 경우에 창조성을 유발하는 힘은 순전히 근성인 것 같다. 말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시간이 멈춰버리는 몰입 상태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100일에 하루 올까 말까 한 그런 날이면 지구상 최고의 축복을 받은 듯하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날은 순전한 고문이어서 마치 내가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계속하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지상천국에 와 있는 듯한 그 드문 순간들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것이 내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 작업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그 일을 할 때 진정한 내가 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누군가 있잖아, 어느 날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걸 원고지든 캔버스든 메모장이든 아무 데고 옮기기로 결심했거든. 그랬더니 내가 예상했던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얻었지 뭐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진정한 능력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은 발견, 즉 자신의 안과 밖을 두루 탐험하는 발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그 과정에 투항하면 발견을 하게 된다. 영 내키지 않더라도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의 끝에 이르면, 당신은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 저기가 내가 가려던 곳이었군. 그러나 도달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사실 나는 아이디어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내 안에서 샘솟는다. 적절한 형식을 찾지 못한 채로 몇 년이 흘러갈 때도 많다. 내 소설 중 상당수는 공책에 적어놓고도 그 다음을 어떻게 전개할지 갈피를 못 잡던 몇 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적어놓고 5년쯤 뒤에 다시 공책을 넘겨보면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흔히 창조성이라고 하는 과정은 이렇듯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어디서 오는지 결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창조성이 그토록 흥미진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창조성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데 따르는 최대 난관은 일부 창조적인 사람들이 너무도 치졸하고 쩨쩨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이 안 되기를 바란다. 이른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의 불행에 안도감을 느끼며 기뻐하는 마음을 뜻하는 독일어) 심보가 팽배하다. 아마도 그런 게 예술가로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 더 월등한지는 동시대인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그 작품과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모차르트 시대 사람들은 <마술피리(The Magic Flute)>가 얼마나 위대한 오페라인지 알았을까? 그 작품의 초연 장소는 가벼운 코미디를 주로 공연하는 허름한 무대였다. 셰익스피어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 많다. 그런데 아버지가 삼촌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삼촌과 재혼하는 덴마크 왕자에 대한 길고 복잡한 희곡은 왜 쓴 걸까? 누군가 셰익스피어를 찾아가 당신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군요!라고 말했다면 그는 『햄릿』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모든 문제를 핵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지 부시의 멍청한 짓거리로 세상이 조만간 폭발하지 않고 200년 후에도 인류가 살아있다면, 아마 그때 가서는 누군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최고 희곡이 무엇인지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와 거리가 너무 가깝다. 그래서 나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내 작품이 미칠 영향력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건 사람들이 내게 사실을 말해준 다음의 얘기다. , 이 책은 이러저러한 사람들에게 이렇고 저런 영향을 미칠 거야. 이런 식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글쓰기에 철저히 몰입할 뿐이다. 내 책 중에는 세간의 사랑을 받아서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있고, 그만큼 팔리지 않은 것들도 있다. 어쨌든 작업하는 동안에는 이런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명과, 그 소명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만 생각한다.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 삶을 단순화시키는 발명

스티브 워즈니악은 1976년에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 컴퓨터를 세웠다. 이어서 1970년대 중반에 애플Ⅰ과 애플Ⅱ를 세상에 선보인 그는 퍼스널컴퓨터의 발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워즈니악과 애플 컴퓨터는 엔지니어로서 쌓은 경험과 더불어 발견에 대한 집요한 의지로 세상을 바꿔놓았다. 이후 워즈니악은 거물 투자자로 변신했으며, US 페스티벌을 통해 콘서트를 홍보하고 자선사업에도 힘써왔다.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고, 국립기술훈장과 하인츠 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내 창조성의 원천은 수줍음 많은 성격과 컴퓨터에 대한 애정, 이 두 가지이다. 워낙 부끄러움이 심해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직업은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는 접근법으로 차별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컴퓨터는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 고등학교 가서는 컴퓨터 설계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칩을 더 적게 쓰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하는 걸 나만의 게임으로 삼았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컴퓨터 설계를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컴퓨터 설계를 직업으로 갖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그냥 재미 삼아 했을 뿐이다. 동기는 내면에 있었다. 이 작은 게임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려고 안간힘을 썼던 이유는 승자의 기분을 맛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일로 보수를 받고, 명예를 얻고, 심지어 상을 타거나 요트를 소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즐거웠고, 그 일이 컴퓨터 설계였을 뿐이다. 그저 컴퓨터의 작동 방식을 사랑했고, 나만의 컴퓨터를 설계하고 싶었다. 나는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가격대의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부품들을 구해서 그걸 어떻게 연결해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결합된 부분들이 너무 많으면 그 설계는 폐기해버렸다. 작고 짧고 단순해야 했다. 사물을 단순화시켜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창조성의 가장 큰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전자공학 중에서도 좀 더 독특한 분야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누군가 그건 그런 게 아니지, 거긴 이 칩을 써야지라고 지적하거나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경쟁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내가 선택한 일, 내가 옳다고 믿고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고 판단한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걸 불편해하지도 않는다. 칩이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납득시킬 필요도 없다. 내게는 적절한 기술이 있고, 그것을 이용해서 뭔가 의미 있는 걸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일은 내게 자신감과 행복을 주고, 다행히 나는 그런 능력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뭔가를 생각해냈는데 옆에서 아니지, 아니야. 그 방법은 틀렸어라며 고개를 젓더라도 그 사람들 말에 개의치 말고 혼자 힘으로 진실에 도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평가할 때 남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조적인 엔지니어라고 한다. 나는 늘 유용하고 실용적이면서도 값은 아주 싼 물건을 만드는 걸 최대 목표로 삼고 살아왔다. 그리고 PC가 우리의 생산성을 올려주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더 행복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여정에서 다만 한 점에 불과할 뿐이다. 인생은 얼마나 행복한가,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얼마나 더 많이 웃었는가에 달렸다. 돈이 얼마만큼이고 요트가 몇 척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회사를 얼마나 잘 운영하고, 집안 살림을 어떻게 하는지도 관련 없다. 순전히 행복에 대한 문제다. 아주 조금만 소유하고도 여전히 행복하고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 - 디자인의 제너럴리스트가 되다

그래픽디자인과 건축설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밀턴 글레이저는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동시에 후학 지도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포스터와 그래픽 등 수많은 성과물로 잘 알려졌고, 1954년 푸시 핀 스튜디오를, 1968년에는 《뉴욕 매거진》을 공동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뉴욕에 있는 수많은 레스토랑 디자인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2004년에는 스미소니언 쿠퍼-휴잇 평생공로상과 미국 국립디자인박물관의 컨템퍼러리 디자인 공로상을 포함한 권위 있는 상을 다수 수상했다.

 

진정한 창조성은 전례가 거의 없는 표현이나 개념을 창출해야 하는데, 그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로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광고나 디자인은 대중적인 인식을 유지해야 하는데, 대중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반발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 처음 부딪치는 한계는 이것이다. 대중은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가? 새로운 것은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대중과 소통할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대상층이 새로움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이다.

 

아이디어는 도처에서 샘솟는다. 개인적으로 내 아이디어의 가장 큰 원천은 독서다. 인류학과 행동주의, 뇌 구조 관련 서적도 읽는다.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은 곳, 도무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는 곳은 동시대를 사는 다른 이들이 그 당시에 벌이는 행동들이다.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면 이미 종료된 상황이다. 아이디어는 각자의 개인사와 다른 세대가 거쳐온 세월, 그리고 시각 예술의 역사가 만나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늘 인류 역사에 생각의 연속성이 존재하고 우리가 거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아이디어는 한 개인의 과거와 다른 세대의 과거, 그리고 세계의 시각예술, 이 모든 차원이 광범위하게 축적되어 나온다. 예술과 기술의 흐름도 수천 가지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빈 왕조의 세습이나 르네상스도 마찬가지다.

 

창조성을 멈추지 않으려면 과거에 이룬 성취는 폐기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토대로 다시 새로운 것을 쌓아야 한다. 아이디어 몇 개에 자신을 한정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나는 어떤 아이디어건 수정할 여지가 없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걸리면 마치 예금계좌처럼 뭔가를 투자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도 낡은 느낌을 준다면, 그런 아이디어는 버려야 한다. 작업은 유기적이어야 하며, 시간을 은행의 돈처럼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작업 도중에, 심지어 완성을 한 뒤라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했을 뿐이라는 판단이 서면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폐기한다.

 

척 클로스(Chuck Close) - 예술의 신비로운 비밀을 밝히다

미국의 극사실주의 화가인 척 클로스는 독특한 격자를 이용한 대형 초상화 작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에게는 완성된 결과물 못지않게 예술성을 실현하기까지의 창조 과정도 중요하다. 클로스는 30년 넘게 독특한 방식으로 판화 작업을 하며 전통적인 한계를 확장한 장인이기도 하다. 1973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전 세계 명성 높은 미술관에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척 클로스는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구상(具象) 미술의 대가로 추앙받고 있다.

 

내가 우리 마을에서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더 심한 갈증을 느끼며 더 큰 것을 원하기는 했다. 내게는 다른 재능이 없었고, 미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내 재능의 달걀을 전부 한 바구니에 담았다. 사람들은 대개 잘하는 게 너무 많아서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관심 폭이 매우 좁다는 뜻과 같다. 그런데 바로 내가 그렇다. 나는 앞뒤 따지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매진해왔다. 고속도로에 올라선 채로 거길 벗어나는 진출로를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하고, 작업에 몰두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차별화시켰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작업에는 영감이 많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항상 영감은 아마추어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내가 알기론 주목할 만한 현대 예술가 중에 영감을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멍청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내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내 작품과 내 삶을 물들였고, 그 흔적들을 깨끗이 지워내는 일은 힘겨웠다. 뭔가를 사랑하면 그걸 작품에 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작품이 아니라 다른 사람 작품이다. 그것을 지워버리기가 그토록 힘든 이유는 너무나 사랑하는 것을 끊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데 쿠닝의 색감을 자주 차용했다는 걸 실감하지만, 데 쿠닝처럼 보이지 않는 방식을 개발했다. 그러므로 뭔가를 흡수해서 자기 일부를 만들더라도 그것을 변형할 방법을 찾아 자기만의 구체적인 도구로 녹여내야지, 그 사람의 도구를 그대로 가져다 써서는 안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모든 걸 사각형 내부에서 찾고, 이미 완성된 사각형 옆에서 아직 완성하지 않은 사각형들을 예측하며 모든 결정을 맥락 안에서 내리려 한다. 내 방법은 골프에 가깝다. 골프는 잘못을 바로잡는 개별 동작의 이상적인 개수를 따지는 유일한 스포츠다. 첫 스토로크를 하고 나서 두 번째 스트로크로 바로잡고, 세 번째에서 그걸 또다시 바로잡는다. 제대로 하면 그쯤에서 그린에 올라가고, 네다섯 번째 스토로크에서는 티오프 때 볼 수도 없었던 아주 구체적인 10센티미터 구멍 속에 볼을 집어넣게 된다. 몇 차례 진로를 수정하며 푸른 자연 속을 걷는 사이에 거기 도달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가려면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서 푸른색 위에 오렌지색을 칠한다. 자, 이제는 뭐가 필요할까? 여전히 차가운 느낌이 조금 과해 보여서 가운데에 노란색을 섞는다. 그러다 반대 방향으로 치우쳤다 싶으면 중간에 차가운 색, 이를테면 녹색 계열로 칠해준다. 이것은 뭔가를 개념화해서 그대로 실행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사고 과정이다. 이렇게 나는 색을 칠하고, 그 위에 작업을 하고, 색이 마음에 안 들면 또 다른 색을 칠해서 서서히 원하는 그림을 가다듬어간다.

 

크리스 뱅글(Chris Bangle) - BMW 그룹 디자인을 구현하다

크리스 뱅글은 BMW 그룹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BMW를 단연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을 창조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그는 BMW 그룹 내에서 BMW와 미니, 롤스로이스에 이르는 모든 브랜드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오펠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크리스 뱅글은 피아트로 옮겨서 피아트 센트로 스타일레의 수석 디자이너를 지냈다. BMW에 합류한 것은 1992년이며, 최초의 미국인 디자인 팀장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가 수장이 된 이래 그동안 둔감할 만큼 보수적이라고 여겨졌던 BMW의 스타일에 미래지향적인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고, BMW의 전통적인 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스타일의 변화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이디어와 그 흐름은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건 권한이 주어졌을 때 아이디어가 흐른다. 여기서 권한 부여라는 것은 도와준다거나 비호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아이디어가 전파되고 성장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개중에는 아이디어를 너무 보호한 나머지 그것 말고 다른 요소들은 전혀 지니지 않은 것 같은 사람도 있다. 물론 아이디어 자체를 파는 회사라면 그렇게 애지중지할 필요가 있겠지만,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개발하는 회사에서는 일상적인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활성화시켜야 한다. 한 가지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오래 집중하면 다른 아이디어를 창출할 통로도 막혀버린다. 권한을 부여하는 과정이 차단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다른 의견들을 받아들이면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나는 행여 다른 사람이 내 아이디어를 가져갈까 걱정하지 않는다. 내게는 더 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능력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관습을 탈피한 개념을 좋아하고, 팀 구성원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발상과 시각을 자극하면서 그 과정에서 통찰력을 향상시키는 걸 좋아한다.

 

여기 BMW에서 내 역할은 촉매제다. 화학반응을 일으키려면 분자가 한 개 이상은 필요하다. 그리고 변화의 기운이 무르익은 요소들과 끝까지 가보겠다는 공통된 의지, 여기서는 기업의 의지가 필요하다. BMW 같은 회사에서는 창조성에 협력 과정이 필요한데,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다며 전면에 나서서 공치사를 하는 것은 디자인 팀장의 역할이 아니다. 내 일은 팀 차원에서 추진할 일관성 있는 디자인 전략을 세우고, 명료하고도 합당한 토론을 거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늘 소통을 통한 상호 이해를 도모한다. 종이에 그린 디자인을 눈에 번쩍 뜨이는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치열하게 노력할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시점에서 내리는 기술적인 결정과, 이후에 미학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상적인 연결고리를 확실히 해두어야 하고, 반대편 입장에서 내린 결정들이 공동 목표를 성취하는 데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한다.

 

스티븐 홀(Steven Holl) - 규칙을 파괴하다

스티븐 홀은 2001년 《타임》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건축가였다. 건축가로서 그의 행동반경은 박물관으로부터 교회, 대사관, 학교, 주거 시설까지 다양하다. 미국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와 중국에 이르기까지 지역에도 한계가 없다.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키아스마 현대미술관과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에 있는 넬슨-앳킨스미술관 확장 공사는 그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금관문화훈장과 핀란드 알바 알토 메달, 쿠퍼-휴잇 국립디자인박물관의 건축 부문 디자인상까지 권위 있는 상을 두루 수상했다.

 

창조적인 사람은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심지어 과학의 영역에서도 객관과 주관이 어우러진다. 실용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면 미지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꿈을 펼쳐야 한다. 꿈의 개입을 허용해야 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고에 주관이 스며드는 일은 아주 결정적이다. 늘 똑같은 길만 마르고 닳도록 걸어 다니는 사람은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다. 제임스 왓슨이나 프랜시스 크릭 같은 이들을 생각해보자. 두 사람은 생명의 비밀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찾아냈다. 이 비밀은 한 길만 쭉 따라가면서 꾸준히 연구하다가 찾아낸 게 아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제 꼬리를 삼키는 뱀의 꿈을 꿨고, 그 다음날 이중나선 구조를 그렸다. 그리고 그것은 생물학과 유전공학 분야에서 찬란히 빛나는 창조적인 업적이 되었다. 그것은 실용적인 접근법에서 도출된 게 아니다. 영감의 순간, 즉 꿈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적용하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한 시간 정도 그림을 그린다. 오래전부터 똑같은 5~7인치 영국제 수채화용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왔고, 지난 25년 동안 그린 그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내겐 그건 이를테면 두 번째 기억 저장고와 같다. 가끔은 건물을 스케치하지만, 전혀 생소한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아무 제약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 무작정 상상력이 마음껏 내달리도록 방치하기도 한다. 물론 실질적인 프로젝트를 고민할 때도 있다. 이것은 나 스스로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나만의 기술이다. 내 건축 디자인 중에는 이렇게 초기의 아이디어 스케치에서 시작된 것들이 많다.

 

건축은 인간의 몸과 같다. 몸이 제 기능을 하는 데 필요한 부분들, 이를테면 폐나 간 같은 기관들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영혼이 없으면 걸어 다니는 시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건축에서 창조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5퍼센트에 불과하고 95퍼센트가 기술과 땀으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바로 그 5퍼센트다. 모든 프로젝트 초기에는 두 가지 일이 생겨야 한다. 첫째는 경쟁 상태에서 개념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프로젝트에 접근할 때는 관습적 사고를 따르면 안 된다. 그건 나의 철학이다. 필요하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다른 길로 가봅시다. 먼저 창조적인 해법을 찾고 나서 나중에 실용적인 문제들을 고민합시다.

 

나는 꿈이 많다. 건축가로서 창조적 프로젝트를 완성하겠다는 포부, 그리고 최대한 그 이상에 근접하도록 구현하는 능력. 내게 성공이란 이런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시애틀대학교 캠퍼스에서 작업한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도 있다. 그 교회는 내가 고향 근처에서 작업한 첫 프로젝트였으며, 그 건물로 미국건축가협회(AIA) 상도 받았다. 하지만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어느 날 근처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고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계산대 직원은 건축가라고 적혀 있는 신용카드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 건축가시군요. 그러면 시애틀대학 교정에 있는 교회에 가보셔야 해요. 정말 대단한 작품이거든요. 물론 그 사람은 내가 그걸 만든 장본인이라는 걸 몰랐다. 단지 그 교회가 위대한 건축이라는 걸 알았을 뿐이다. 그 경험은 내게 그 어떤 상보다 의미가 깊고 뿌듯했다. 교회가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추상적이거나 불가해하거나 선험적인 차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다름 아닌 이것이 바로 테스트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창조적인 건축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 빛을 보고 공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